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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제한인문학회 국제한인문학연구 국제한인문학연구 제24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19 - 172 (5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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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두 번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그 첫 번째로 「동아시아 전통사상과 진화론 수용의 계보를 통해 본 한국 근대소설➀-애국계몽기 이해조·이인직과 1910년대 양건식·이광수의 산문을 중심으로」를 게재하고 이어,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는 본 논문이 그 두 번째에 해당한다. 이 연구는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 한·중·일 3국의 진화론 수용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그 계보를 파악한 후, 이것이 신소설 시대 이해조·이인직과 1910년대 양건식·이광수에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분석하는 것을 우선에 두고자 했다. 특히 동아시아 전통사상에 대한 작가들의 대응양상에 주목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진화론 수용이 이들의 사상과 문학세계에 어떠한 위치와 가치로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했다. 산문 분석에서는 이해조의 「倫理學」과 이인직의 「社會學」을 중점 살폈고, 양건식과 이광수는 1910년대 「칸트철학」번역과 「동경잡신」등 그들의 다양한 산문을 보았다. 그 결과 이해조·양건식은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려 한 반면, 이인직·이광수는 진화론 수용 양상에서 철저한 전통의 배제를 통해 반전통과 비주체적 태도로 일관했음을 확인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전통사상이 배태한 ‘도덕’과 ‘윤리’ 의식이었다. 이것은 당대 자연주의적이고 기계론적 사유와 이것을 극복하려는 심학(心學)의 대결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실(實)과 명(名)의 조화였다. 실은 말 그대로 현실을, 명은 새로운 이념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조와 양건식은 중국의 옌푸(嚴復)과 량치차오(梁啓超)의 사상적 맥락을, 이인직과 이광수는 독일 에른스트 헤켈(Ernst Heinrich Haeckel)과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의 사상에 기댄 자세를 취했다. “모든 근대담론은 진화론 쟁투에서 비롯했다”는 가설 아래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였다. 작품 분석을 시도한 본고에서도 이 같은 작가들의 인식론은 거듭 확인되었다. 신소설 시대, 이인직 만큼 반봉건 정신에 투철했던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많은 논자들이 공통으로 내놓는 평가들이다. 신소설이 태어났던 애국계몽기(1905-1909), 조선은 식민지로 떨어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인직의 작품에는 처절한 반봉건은 있으나 반외세·반제국은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인직의 반봉건의 실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그에게 반봉건의 화살은 모두 당대 집권층에 집중됐다. 이것은 실로 조선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 조선을 향한 화살은 그대로 작품 속에 이어져 식민제국(일본)의 길을 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났다. 이인직의 반봉건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실(實)에 부합하는 새로운 명(名)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인직은 그 자리에 ‘피비린내 나는’ 사회진화론을 세움으로 일본 식민제국주의 길을 추인했고, 그 길을 추종했던 결과로 나타났다. 작품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자조적 망국론’ 나아가 ‘필연적 망국론’, ‘대아시아주의’ 등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해조는 당대 현실(實)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명(名)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은 기존 명의 무조건적인 파괴가 아니라 이해조 시대 대세를 이루었던 사회진화론과 전통적 명의 습합으로 나타났다. 유가적 세계관이 해체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해 전통과 서양지식(과학적 사고)의 재창조를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윤리’와 ‘도덕’을 재발견하고 이것을 전통과 서양지식의 괴리를 막는 하나의 보완제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 노력은 각성한 자아·전통적 윤리관·덕육의 실천 등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양건식 또한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하나인 불교를 문학의 첫 출발지로 삼았다. 모두가 진화와 진보의 열망에 들떠 있을 때 그가 한 걸음 물러나 근대의 ‘분기점(分岐點)’에 비판적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도 불교정신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양건식 단편은 서사가 진행될수록 주인공과 현실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는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1910년대 다른 단편들은 이와는 다른 양상이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주체형성을 위해 정신적 고투를 벌이지만 현실은 갈수록 자신을 무력하고 허위로 가득 찬 존재로 만들어 간다. 이럴 때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정체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거리감을 두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문제는 이를 허용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시기 내면의 서사 대부분이 현실과의 적극적 교섭을 통한 인식상의 질적 비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자기회로로 회귀하는 서사적 진폭을 보여주었던 것은 이러한 대응에 실패한 결과였다. 이것을 역사적 상황의 산물로 받아들여야 만하는 것인가? 식민지 근대란 시대에 나란히 들어설 수 없는 ‘문명개화․입신출세’ 등의 대의가 과도하게 젊은 지식인들을 압도했던 것은 아닌가? 특히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입신출세에 대한 전망 또한 점차 좁아지는 상황에서 강제된 대의가 자아의 분열을 불러온 것은 아니었던가? 이러한 질문들에 양건식의 작품은 1910년대란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는 답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되는 것이다. 양건식과 동시대를 살다간 이광수의 길은 달랐다. 근대 자체를 회의했던 양건식과는 달리 이광수는 근대가 제공한 사유체계와 물질적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자 했던 ‘근대숭배자’였다. 오도된 진화론, 즉 사회진화론을 적극 수용했던 이광수의 태도 또한 같은 선상에서 바라 볼 수가 있다. 이렇듯 사회진화론은 1910년대 다양한 근대담론의 저류로 작용했던 것이다. 전통에 대해서는 강력 반발했지만 서구와 일본 발 근대 담론을 큰 저항 없이 내면화하면서 작품 속에 충실히 재현하려 했던 이광수는 ‘전통을 잃어버린 고아’였던 셈이다. 문제의 출발은 진화론 수용양상에서부터 이광수는 양건식,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소설 시대 이해조와 달랐다는 데에 있다. 전통을 철저히 외면한 이인직과 이광수는 근대숭배자로 일본의 눈을 통해서만 서구문물을 바라보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아직도 한국 근대문학의 축복이 아닌 ‘아픈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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