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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51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37 - 172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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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5~16세기 조선의 동북 변경인 豆滿江 流域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주목하여 여기에 각종 성곽 시설이 축조된 과정을 정리하고, 이어서 성곽으로 인하여 나타난 女眞 사회의 변화와 새로이 수립된 변경 방어 전략은 무엇인지를 검토하였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두만강 이남 지역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영토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世宗代에는 慶源·會寧·鍾城·穩城·慶興의 5鎭을 설치하여 군사 거점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각 진의 사이에 長城을 쌓아 영유권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이로 인해 오래전부터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여진 무리는 성곽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일부는 조선에 귀부하여 성벽과 가까운 지역에 머물러 살기도 하였다. 조선 조정은 그들을 가리켜 城底野人이라 부르며 군사적 또는 경제적으로 보호해주는 한편, 외적에 대한 정탐과 전투를 담당하게 하여 성곽과 함께 변경을 방비하는 일종의 울타리(藩籬)로써 활용하였다. 16세기에 이르면 장성은 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파손의 보수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허술한 부분이 늘어났고 본래의 방어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두만강 이북 지역에 여진 인구가 폭발적으로 집중되었고 성저야인 중에서도 강을 건너 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조선에서는 성저야인 대신에 두만강 너머의 귀순 여진까지 널리 포괄할 수 있도록 藩胡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번호는 內地 深處의 야인과 화친을 맺고 교류를 늘려나가면서 조선의 영향력으로부터 차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결국 조선은 불손한 여진 세력의 위협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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