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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1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15 - 169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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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혁명은 조병갑의 학정에 반항한 고부기포가발단이 되었다.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은 고부기포를 동학농민혁명으로 확장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 3월 20일 무장에서 재기포하여 26일 백산 대회를 기점으로 혁명을 본격화하였다.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의 승리로 자신감을 획득한 동학농민군은 4월27일 호남의 수부인 전주성을 무혈입성해 동학농민혁명의 1차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쫓아온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연패하면서 위기감에 빠지게 되었다. 또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농번기의 도래와오랜 타향생활에 따른 피로감도 쌓여갔다. 반면에 조정에서도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청국군의 차입을 요청하였고 이는 일본군의 출병으로 이어졌다. 양국 군대의 차입으로 정치불안이 고조되자 조정에서는 양국의 군대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동학농민군의 해산이 필요했다. 또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고 관군의 오랜 숙영으로 인해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전주화약은 이러한 양측의 필요에 의해 맺어졌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의설치와 폐정 개혁의 실시를 요구했고, 조정에서는 무기의 회수와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양측은 이에 합의하여 전주화약을 맺고 동학농민군은전주성를 빠져나왔다. 조정에서도 중앙군의 일부만 전주에 남기고 철수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군현에 집강소 설치를 수용하여 표면적으로는화약의 내용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과 정부군 모두에게 만족할 수없는 불완전한 합의에 불과했다. 전주화약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관민상화의 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어민의가 국정에 반영되는 첫 사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는왕조국가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이후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계기를만들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전투를 통해 많은 희생자를 내었지만전주화약을 통해 민의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동학농민군의 고부 기포에서 전주 화약까지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관군의 기록과 동학농민군의 기록, 그리고 제3자의 기록을 상호 비교해서 서술해야 한다. 동학농민군의 기록은 기포에서부터 전주 입성까지의 기록을 상세하지만, 완산 전투와 전주 화약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반면에관군의 기록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그리고 전주 입성 전투에 관해서는자신들의 과오는 기술하지 않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반면에 승전을 한완산 전투에 관해서는 전과를 십여 배를 부풀리는 과장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의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제3자의 기록은 초기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초기 동학농민혁명의실상을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군과 동학농민군, 제3자의 기록을 종합적으로 상호 비교하여 서술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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