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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성주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5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83 - 11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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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희생자 현황과 홍주의사총과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은 탄압의 대상이었다. 초기 고부기포 당시에는 주도세력은 엄격한 처벌, 일반 참여자는 효유의 대상이었지만, 무장기포 이후에는 토벌의 강경 대응으로 전환되었다. 더욱이 일본의 출병으로 지휘권을 확보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토벌’의 대상으로 인식됨에 따라 동학농민군의 희생은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된 일본군을 ‘토벌대’라 불렸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희생자에 대한 현황은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천도교단과 관련된 연구에 의하면 20만 또는 30, 4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홍주의사총의 관계는 동학농민혁명과 병오의병 당시의 홍주성 전투의 종합적 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다. 첫째 참가 인원수는 동학농민군은 최대 6만 명에서 최소 7천 명이었으며, 의병은 최대 5천 명에서 최소 2백 명, 둘째 희생당한 인원수는 동학농민군은 최소 2백 명이며(홍주성에 압송되어 효수당한 동학농민군 제외) 최대 수천 명 내지 3만 명, 의병은 최소 83명이며 최대 1천여 명, 셋째 전투현장은 동학농민군은 서문과 동문, 그리고 북문을 중심으로 홍주성을 공략하였으며, 의병은 홍주성 안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적인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시신 수습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의병은 선유사로 파견된 윤시영 홍주군수에 의해 대부분 연고자가 찾아갔으며, 시친자(屍親者)가 없는 경우만 매장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홍주의사총에 묻혀있는 유해는 1906년 의병이기보다는 1894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동학농민군의 희생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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