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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67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37 - 17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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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 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하였다. 그 해 7월, 조선 통신사 일행이 일본 교토(京都) 대덕사(大德寺) 소겐인(総見院)에 묵을 때 쇼코쿠지(相國寺)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가 찾아가 정사 황윤길(黄允吉), 부사 학봉(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 등에게 부채와 자작 한시를 증정하였다. 당시까지 일본 유학은 오산(五山, 고잔)이라는 폐쇄된 세계에서 내전(內典, 불전)과의 겸수(兼修)를 통해 연구되거나 조정에서 공인하는 공가(公家, 구게)가 가학으로서 세습하여 왔다. 행장과 문집을 통해 볼 때 후지와라 세이카는 1590년 대덕사에서 조선 통신사 일행과 시를 주고받은 이듬해인 1591년(일본 天正 9년),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가 상국사에서 오산 승려를 모아 제시연구(題詩聯句)를 행하는 모임에 단 한 번 출석하고는 이후 출석하지 않았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사상적 전회는 일본지성사에서 매우 특기할 만한 사건이며, 그 전회는 바로 대덕사의 만남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당시 상호간에 지은 시가 현재 21수나 확인되는 것을 보면 이때의 만남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의 문집은 두 종류이다. 그런데 초기 목판본에는 조선 통신사 일행의 시만 수록하였고, 후기 필사본 문집에는 세이카의 시들만 실었다. 이 가운데 학봉이 세이카에게 준 시는 2수가 확인된다. 필사본 『성와문집』의 권4에 수록된 「상인 종순이란 사람이 상국사에서부터 시를 소매에 넣고 내방하였기에 그 시에 차운하여 감사드린다[有上人宗蕣自相國寺袖詩來訪次其韻謝之]」는 황윤길(黃允吉)의 시이다. 일본 학자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이 시를 학봉의 시로 본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필사본 『성와선생문집』 권6 수록의 칠언율시 「송당에 올리다[贈松堂]」와 운자가 같은 점에서 알 수가 있다. 세이카는 시를 통해 학봉 등 1590년의 통신사 일행과 교유하려고 하였다. 학봉은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성심으로 차운을 하였고, 세이카를 같은 인간 본성을 지니고 같은 지향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대해 주었다. 『학봉집』에 「뜰의 소나무를 읊어서 종순에게 주다[詠庭松贈宗蕣]」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한 수의 창화시에서 학봉은, 낯선 나라의 것이라도 소나무로서의 물성은 같으며, 송뢰(松籟)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자연의 무현금(無絃琴) 소리를 공감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 인물의 풍모는 이념의 직접적 전수보다도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유학은 이념을 확인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만 유지된 것이 아니다. 현실정치나 지역공동체 삶에서 예치(禮治) 이념을 실현하고 재도문장(載道文章)․경국문장(經國文章)․화국문장(華國文章)을 통해 문치를 구현하는 유학자에 의해 지탱되었다. 학봉과 그 일행이 교토 대덕사에서 젊은 일본의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유학자적 인격이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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