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熙興 (대구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 제57호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81 - 113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내시 호성공신 월성군 최언순 가문은 조선시대 내시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쇠귀 할머니 전설과 관련된 가문이다. 고려말 쇠귀할머니는 내시 7형제를 길러 궁중에 벼슬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관동파와 자하동파로 나뉘어졌다. 효촌리에는 관동파들이, 삼상리에는 자하동파들이 정착하였다. 1970년대 양주 삼상리에서 이이화가 만난 정완하 노인이 전해준 쇠귀할머니 전설의 내용이 서울 역사박물관 소장 족보에 “양자칠형제” 되어 있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무덤이다. 시조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족보에 존재하는 5대 정려손은 무덤은 이말산에, 내시 나업은 삼상리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가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문은 번성한 것은 조선 선조대 호성공신 월성군 최언순부터이다. 벼슬은 숭록대부 승전색을 지냈다. 최언순의 양자 나업은 청과 관련된 활동과 장릉 시릉관의 공 등으로 내수사차지를 담당하였다. 이에 가문은 번성하게 된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나업처정경부인한씨사형제등처분급문”이다. 이후 양주 장흥 삼상리를 중심으로 집단 거주지 형태를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족보는 1683년(숙종 9) 오윤주가 처음에 정리하였으며, 『양세계보』와 달리 대부분 품계와 벼슬, 묘의 위치, 양자 수만 기록되었다. 11대 오윤주 이후 16~19대까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에 추가하여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17세기 중반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2명 이상 입양하였을 때 장자와 차자의 구분없이 “子”라고 하였다. 대신 후손이 없을 경우 “無後”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같은 내시 가문이라는 의식은 선산을 같이 사용하고, 항렬[돌림자]를 사용하면서 동족의식을 이어간다. 가문의 번성은 최언순 1자-최흘 3자인 임우문 가문이 가장 번성하였다. 벼슬 역시 숭록대부 등 상당하여, “無後’도 3명뿐이다. 벼슬에 나간 사람은 55명 32명으로 가장 많다. 물론 나업 후손 역시 55명으로 많지만 후대로 갈수록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여 양자를 들이지 못하거나 1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상으로 쇠귀할머니 전설과 관련된 선조대 호성공신 월성군 최언순 가문은 임진왜란 전후에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나업, 임우문 등의 활약으로 가문은 점차 증가하였다. 최언순을 기점으로 양주 장흥 삼상리에 정착한 가문임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扈聖功臣 崔彦恂 家門의 形成
3. 族譜 構成과 家系 繼承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4)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0-380-000361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