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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61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41 - 6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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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의 ‘대원동’은 지리산 大源寺가 위치한 그 洞天을 일컫는다. 南冥 曺植(1501-1572)에 의해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때는 獐項洞이었고, 1685년 雲卷大師가 그곳에 있던 사찰 이름을 大源庵이라 바꾼 이후 대원동으로 일컬어졌다. 인근의 남명 유적지 德山洞에 묻혀서 인지도가 크게 없었고,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경관이 빼어난 壺中別天地로만 인식되어 河受一⋅河弘度⋅鄭栻 등 몇몇 강우학자의 발길이 닿을 뿐이었다. 그런 대원동이 19세기에 들어와 ‘道의 큰 근원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으며, 특히 ‘덕산-대원사-천왕봉’ 유람 코스가 열리면서 수많은 강우학자가 대원동을 찾아왔다. ‘도의 큰 근원이 흘러나온다’는 문구는 중국 漢나라 때 董仲舒가 한 말인데, 朱熹가 이를 『中庸』에 인용함으로써 조선조 성리학자에겐 경전 구절이나 진배없이 받아들여졌다. 동천의 이름 뜻이 바뀌면서 대원사 전각과 누각의 명칭도 불교 용어가 아니라 朱子의 「觀書有感」에 보이는 ‘天光’과 ‘雲影’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도록 지속되었다. 주지하듯 지리산권역에서 ‘남명’으로 대표되는 공간은 덕산과 천왕봉이고, 대원동은 이 둘 사이에 위치한 별개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덕산-대원사-천왕봉’ 코스를 선호하게 되고, 특히 어느 코스로 천왕봉에 오르던 ‘덕산’을 심하게 애호하면서 인근의 대원동 또한 남명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시기 대원동을 유람한 강우학자들이 始終 남명을 찾는 것에서도 변화된 공간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대원동은 오랜 시간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인식되어 오다가 조선후기 성리학의 발달로 인해 도학의 근원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인식이 변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강우지역의 특수한 상황과 국내외의 급변하는 시대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남명정신 구현을 염원하던 강우학자의 덕산동 유람이 많아졌고, 이에 힘입어 남명의 발자취가 남아있던 대원동도 덕산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찾는 명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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