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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42집
발행연도
2020.7
수록면
75 - 102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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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은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살다가 1949년 세상을 떠난 유교개혁론자이며,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다. 유교는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까닭에 한말까지도 사회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호개방 이후 밀려든 서구 문명 앞에서 유림의 대응 방략은 무력하기만 하였고, 유교는 구시대의 유물로 인식되어 개혁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유교개혁론자들은 대부분 유교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고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 서구 사상으로 그 단점을 보완하려 한 사람들이 많았다. 송기식 또한 그런 개혁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송기식은 처음부터 유교개혁론자는 아니었고, 초기에는 위정척사계열의 유학자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규탄하는 의병이 일어났을 때 19세의 나이로 의병장 김도화 아래서 서기로 종군하였다. 이후 김흥락과 사제의 인연을 맺고, 퇴계 학맥의 주류를 계승한 그는 평생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하나는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력을 상실하였던 유교를 부흥하는 일이었다.
송기식은 1895년 의병에 참가한 다음 1909년 이상룡이 대한협회안동지 회장이 되자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이 무렵 송기식은 이상룡과 긴밀한 협의 끝에 봉양서숙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투신하게 된다. 그가 이렇듯 위정척사파에서 애국계몽운동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서구 사상을 소개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시민사상이 담긴 책들을 섭렵하였고, 이상룡의 권유가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동의 협동학교‧동화학교‧보문의숙‧봉양서숙 등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그 결과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옥사에 투옥되었고, 이후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어 있다가 다시 경성 감옥으로 옮겨졌다. 1920년 영친왕의 가례를 맞아 석방된 그는 출옥한 이듬해 유교혁신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유교유신론』을 발간하였다. 1932년 송기식은 경성유교회 안순환으로부터 녹동서원 명교강습소 교수직으로 위촉받아 유교의 종교화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본고는 송기식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사상적 전환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어떤 행동양식의 변화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목차

요약
1.머리말
2. 위정척사론자에서 애국계몽운동가로 변신
3. 안동 지역 3.1운동 주동과 옥중생활
4. 『유교유신론』의 저술과 교육활동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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