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의 감옥인 전옥서에 관한 법규는 『육전조례』에 대폭 마련되었다. 전옥서는 형조의 속사였는데, 형조와 전옥서의 거리가 가깝지 않아 심리 장소인 형조와 수감장소인 전옥서를 왕복하는 과정에서 판결 지체, 죄수의 죽음, 탈옥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전옥서를 이전하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했으나 전옥서 건물을 새로 지어야 한다는 부담, 주민들이 옮겨가 살지 않으려한 점, 전옥서에 의금부, 육조, 사헌부 등 각사의 죄인들도 수금된다는 점에서 전옥서 이전은 현실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고, 獄間의 수축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사법 행정에 있어서 최대 숙제였던 滯獄의 문제는 죄수를 내보냄으로써 감옥을 비게 하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전옥서에 대한 『육전조례』 조문은 전옥서 관원의 담당 업무와 褒貶 규정, 囚人 救恤, 감옥 관리, 刑具 규정, 重囚․輕囚의 정의, 直囚衙門규정 등이 담겨있다. 관원인 제조, 주부와 참봉의 담당 업무, 獄囚와 刑具 관리, 살옥검험, 의금부 관원의 行刑 등 실제 전옥서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나장 관련 규정, 전옥서 관원에 대한 포폄 규정 등이 정리되었다. 남옥, 여옥 관련 조문, 중수와 경수에게 채우는 형구 규정도 추가되었고, 전옥서의 하루 일과, 죄수 석방, 文案 관리에 대한 일반 행정 법규도 조문화되었다. 특히 중수, 경수를 정의한 조문은 죄수들의 석방 기준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형조에 移文하지 않고’ ‘전옥서에 직접 수감하며’, ‘직접 수사’하고, ‘직접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아문인 직수아문에 관한 규정도 주목된다. 전옥서는 단지 이들 관아에서 보내온 죄인들을 수금할 뿐, 직수 아문 죄수들에 대한 조사나 처벌권은 전옥서에도, 형조에도 없었다. 각 관사에서 徵債나 捧上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가두어 두는 拘留가 잦았으나 조정은 계속 이를 금지시켰다. 전옥서의 이전이나 확장도 불가했고, 구류간도 금지된 상황 속에서 滯獄의 문제는 전옥서를 摘奸하여 경수들을 풀어주는 방법 외에는 특별한 해결책이 없었다. 이러한 실상은 고종대 전옥서에 실제 수감되어 있는 수인들의 현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고종 30년간 수감 인원의 추이를 보면 12년부터 18년까지 수감 인원의 상승세를 보이다가 그 이후에는 수감 인원이 매우 적어진다. 고종 초반의 두 차례 적간에서 10년 이후 거의 매달 경수를 석방한 결과이다. 중수는 대부분 공적인 負債, 즉 公貨․公錢의 미납 등의 죄목이고, 경수 역시 ‘각사직수’ 죄인과 ‘他錢不報’ 죄인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들 각사의 죄수 수금의 주목적은 徵債이고, 公貨, 上納, 贓錢 등을 납부할 동안 본인이나 次知를 수금하였다. 징채 등의 문제로 인한 각 아문 所囚의 죄수들이 체옥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고종대 중, 후반 거의 매달 적간하여 경수를 석방한 것은 이러한 체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구책이었다. 적어도 19세기 전옥서는 징벌적 목적이나 교화의 목적이 아닌 징채의 목적이 주 기능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This research aims to analyze Jeonokseo(典獄署), the prison office of Hyeongjo(刑曹: Joseon’s Ministry of Justice). Numerous data on the legal literature of this government office are found in Yukjeonjorye(『六典條例』) and Seungjeongwonilgi(『承政院日記』). For this study two materials are used. The essential laws of Jeonokseo(典獄署) in Yukjeonjorye(『六典條例』) are as follows. The laws include: the work of prison officials, prisoner release, prison administration, rules of implement of punishment, the definition of a felon and misdemeanor, rules of Jiksuamun(直囚衙門). The problem of the prisons during the Joseon period was that the prison was overwhelmed with prisoners. Prison was was quite cramped, but instead of extending the imprisonment space, it had many prisoners released every month. For this reason, by the late Joseon period, its function of felony imprisonment had diminised. Especially during King Gojong(高宗)"s reign, Jeonokseo(典獄署) had too many prisoners confined for default of debt, Jeonokseo(典獄署) in the 19th century functioned as office to put Charji(次知: a servant or familly member imprisoned in his master’s place) in prison for the purpose of collecting debt. Jeonokseo(典獄署) was where it was originally in the 31st year of King Gojong(高宗)"s reign, and it was converted into Gamokseo(監獄署) later. The appendix is a table that analyzes the data of Seungjeongwonilgi(『承政院日記』). The types of crimes and the number of prisoners for the 30 years under King Gojong(高宗)"s reign are subject to analy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