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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석규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대한무도학회 대한무도학회지 대한무도학회지 제22권 제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7 - 27 (1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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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우리나라 각궁제작 계보 중에서 가장 많은 제작자를 배출한 경북 예천계보의 전통성을도출, 정립함에 있다. 이를 위해 안동권씨 검교공파 대동세보와 현재까지 발표된 예천계보 관련 자료와 선행연구에 대한 상호주관적 논의를 통해 비교, 분석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의 종4품 절충장군을 역임한 권계황이 예천 활 제작의 시초라 한 것과 조선의 문신서열중 상위에 해당하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지낸 권순익의 양반 가문에서 대대로 예천 활 제작을 이어오며 계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조선이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며 반상의 구별이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다소 과장된 것이다. 둘째, 1930년대 예천 활 제작이 재개되었다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예천의 궁술대회 개최에 관한 신문기사를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1959년에 작고한권중원에 의해 1960년대 예천활 제작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으며, 오히려1958년 예천으로 이주한 권영록에 의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는 1971년 문화재관리국이 예천을 대표하는 예천활 제작자로 권영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으로 지정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예천이 각궁제작의 본산이 된 것은 예천의 지리적 여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각궁의 소재 대부분이 깊은 산중에서 자생하는 천연소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천각궁제작의 계보형성은조선의 신분제도가 사라지기 시작한 갑오경장 이후부터인 것으로 판단된다. 1930년대 신문기사와1971년 권영록에 대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지정보고서의 내용은 이를 뒷받침 하는 단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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