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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경화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한국실학연구 제3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47 - 28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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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정신성을 상징하는 묵죽화는 18세기의 문인화가 姜世晃(1713∼1791)이 일생동안 주력한 장르로서 손꼽힌다. 강세황의 묵죽화 대부분은 소형 화면에 대나무의 일부만을 포착하여 표현하는 지극히 사의적인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이 지닌 회화적 특징은 중국 강남지역의 문인들이 선호한 折枝畵 형식과 상통하는 것으로 “남종화풍의 묵죽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세황은 10여개 안팎의 잎으로만 구성된 극단적으로 생략적인 그림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묵죽화를 향하여 丁若鏞(1762∼1836)은 대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소형 묵죽의 제작 조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체로 타인의 요청에 의하여 제작된 그림이었음이 나타난다. 반면에 주로 만년에 등장하는 대규모의 역작에서는 그 이면에서 화가의 자발적인 예술적 동기가 드러난다. 높은 명성을 얻었던 여느 조선의 화가들처럼 강세황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회화 요청을 받는 인기 화가였다.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조정에서 활약하던 만년에는 그를 향한 회화 요청이 더욱 쇄도하였다. 늘어가는 회화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응답하기 위하여 화가로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한세대 앞서 특유의 진경산수화로 세상을 풍미하였던 謙齋 鄭敾(1676∼1759)도 밀려드는 회화 수요를 감당했던 화가였다. 정선이 피곤하고 권태로운 태도로 그리는 倦筆, 한 번에 쓸어내듯이 그리는 揮灑筆法, 혹은 應猝之法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형식적으로 응대한 이유는 바로 수없이 밀려드는 그림 수요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대필화가를 동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안목 있는 평자들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반면에 강세황이 선택한 방법은 짧은 시간에 즉각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묵죽화였다. 비록 간략한 묵죽이라도 육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강세황은 묵죽과 시문의 판각을 마련하고 서화를 인쇄하여 수응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결국 강세황을 대표하는 묵죽화는 수응으로 전문화된 장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세황이 수응화로서 묵죽화를 선호한 이유는 제작의 수월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회화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상적인 문인의 회화로 성립된 묵죽화는 문인화가로서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자아를 구현해주는 장르이기도 하였다. 결국 강세황이 그린 수많은 묵죽화는 화가로서 그의 명성을 대변하며 동시에 그의 정체성까지 담보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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