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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鄧洪波 (中國 湖南大学 岳麓書院 教授) 赵伟 (湖南大学 岳麓书院)
저널정보
한국서원학회 한국서원학보 한국서원학보 제11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51 - 297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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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은 唐代 사인의 서재나 관에서 서적을 보관・정리하는 기관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새로운 인쇄술의 발달과 유불도 융합의 문화 배경 하에 중국 고대 선비들이 서적을 둘러싼 藏書, 讀書, 敎書, 講書, 修書, 著書, 刻書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문화연구, 창조, 누적 및 전파활동을 진행하는 문화교육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으로부터 五代十國시기까지 이어진 전란을 겪고 宋代에 와서 새로운 발전 기회를 맞게 되었다. 北宋서원은 교육・교학 기능이 강화되면서 관학의 대체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天下四大書院”이 있다. 이어서 南宋 시기에 서원은 하나의 문화교육제도로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남송 초기의 혼란스러운 사회 상황은 지식인들에게 인심수습과 倫常의 재건, 새로운 가치이념을 찾아서 민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제시하였다. 장식, 주희, 여조겸, 육구연의 “남송사대서원”에서의 강학은 학술의 번영을 일으키면서, 理學과 서원의 일체화의 형성에 일조하였다. 이 과정 중에 주희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남강군지사 시절 백록동서원을 중수하여 <백록동서원게시>를 제정하고 이학의 입장에 서서 학생들에게 새 교육이념을 전파하였다. 새로운 교육이념의 전파에 따라 서원의 규제가 점차 완비되고, 학문연구, 교학과 전도, 장서, 刻書, 학파종사의 제향, 전답경영 등 이른바 서원의 6대 사업도 형성되었다. 이는 서원이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문화조직이 발전되었고, 그리고 중국의 교육 사업이 관학, 서원, 그리고 사학이 병행하는 시대에 진입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원나라 건립 후 과거제도가 재개됨에 따라 성리학이 다시 정통학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주희도 각 지방에서 널리 모시게 되는 제향인물이 되었다. 元代 서원의 가장 큰 공헌은 遼金시대의 결함을 보충하고, 서원과 성리학을 북방지역에 널리 확산시키면서 남북 문화의 차이를 축소시킨데 있다. 원대 서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리학과 일체화가 된 서원이 관학과 동일시되었다는 것과 건립주체의 다양성 및 교육 규정이 더욱 상세화 되었다는 점이다. 원나라 조정에서 서원의 건립을 적극 장려하면서 蒙古, 色目人도 서원을 건립하였다. 명나라 초기에 程朱學이 또다시 정통학술로 확립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원은 주원장의 서원혁파 정책과 관학 지원책으로 인해 백 년간 침체기를 맞았다. 원나라 말기 전란에 의해 훼손된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등도 장기간 동안 복구되지 못하였다. 명 중엽에 들어 관학교육의 폐단이 발생함에 따라 서원의 설립이 하나의 해결책이 되었다. 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모범으로 서원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당시 胡居仁은 백록동서원 산장으로 부임하여, <속백록동서원학규>를 제정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한편으론 王守仁, 湛若水 등이 정통 철학에 대한 비판의 입장에 서서 전국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心學 전파운동을 전개하였다. 두 사람의 제자 및 후학들은 서원을 설립하고 강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남송 이래의 중국 서원과 학술이 또다시 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와중에 주자학 근거지였던 백록동서원은 왕수인 및 그 후학들의 노력과 서원 정비를 통해 양명학의 일대 진영이 되었다. 명 말기에 서원은 지식인들이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기구화 되었다. 이로 인해 가정, 만력, 천계연간 세 번의 훼철을 겪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대에 서원 제도가 조선으로 도입되었고, 이와 동시에 백록동서원도 조선 서원의 본보기가 되었다. 청나라 초기 주자를 숭상하는 문교정책에 따라 그의 <백록동규>를 본받아서 서원을 설립하였다. 강학 활동을 통해 양명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을 숭상하는 “辟王崇朱”의 풍조가 형성되었다. 청대 초기 하남지역 이학과 서원의 부흥은 바로 이런 풍조 하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옹정 연간에 각 성에 ‘省會서원’ 설립의 시작과 동시에 관의 세력이 서원설립에 강력하게 간여하여 각급 ‘官辧書院’들이 전국 각 지역에서 크고 작은 학술교육의 중심지가 되는 현상이 형성되었다. 관과 민의 공동노력에 청대서원은 도시와 향촌에 널리 보급되어 미증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한편으로 <백록동서원게시>와 <독서분년일정>은 詔令을 통해 공포되어 각 성회서원에서 통용되었다. 다른 한 편으로 張伯行, 王澍 등 일부 관리와 사인들은 송・명 두 시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여 <학규류편>과 <주자백록동조목>을 제정하여 주희와 백록동서원이 지식인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촉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대서원의 과거화, 관학화 정도가 심화됨에 따라 阮元을 비롯한 건륭・가경대의 한학 중심학자들은 송학의 상투적인 틀에서 벗어나 詁經精舍와 學海堂을 세워서 經史 훈고학에 전념하였으며, 이로써 청대서원은 변혁의 길을 열었다. 道光 이후의 서원은 개항으로 유입되는 서양문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내용과 형식상의 재편을 통해 서학과 신학을 도입시켜서 신식서원을 구축하였다. 한편으론 청대 서원의 해외 수출도 계속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백록동서원 정신을 중심으로 한 세계서원문화 체계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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