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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재운 (대구대학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1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53 - 72 (2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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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강역은 건국부터 멸망까지 정치 전개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러한 발해사의 정치사적 시기구분에 대한 의견은 커다란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주요한 분기점은 제3대 文王 시기까지와 제10대 宣王 즉위시점부터라는 점에서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 즉 문왕 이전이 건국ㆍ발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선왕 이후에 중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거기에 동북쪽으로 그 강역을 확대하였다. 발해의 강역은 제10대 宣王 및 제13대 大玄錫代에 가장 넓었다고 하는데, 사방 5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체로 보아 발해의 영역은 남쪽이 신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서쪽은 遼陽의 遼東에 미치고 있었다고 보인다. 북쪽은 대체로 흑룡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거쳐 동쪽으로 연해주에 뻗쳐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발해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異見이 존재하고 있는데, 특히 西邊과 東北境이 그러하다. 西邊의 경우는 요동의 귀속여부와 그 시기 문제, 東北境은 연해주지역의 말갈과의 경계 등이 주요 쟁점이다. 남쪽의 신라와의 경계도 다소의 이견이 존재한다. 우선 발해의 서변에 대한 제논의는 발해가 요동지역 점유를 어떻게 보느냐에 의해 요동점유설과 요동완충설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발해의 서변에 대한 실체 규명을 위해서는 돌궐-당의 동향이나 당-거란의 동향도 고려하면서 이 전투의 배경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발해의 남변에 대해서는 『신당서』를 근거로 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요동완충설에서는 757년 안동도호부 폐지 이후, 발해도 서쪽으로 진출하지 않고 신라도 대동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동 지역은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는 서쪽에서는 경계를 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발해의 북변과 동변은 연해주지역의 말갈유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발해 강역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서변은 사료 검토를 통한 돌궐ㆍ거란과의 관계가, 북변과 동변은 말갈유적의 고고학 성과의 수집과 해석이 관건임을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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