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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46집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139 - 17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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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는 다양한 시설물과 석물<SUB>石物</SUB>은 물론이고 봉분과 현궁<SUB>玄宮</SUB>을 크고 화려하게 조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나 국왕이 자신이 묻힐 능을 미리 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왕릉을 수릉<SUB>壽陵</SUB>이라 한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것은 예<SUB>禮</SUB>에 어긋난 행위였기 때문에 무덤을 미리 조성하는 것이 흉사<SUB>凶事</SUB>를 준비하는 부정적인 행위가 아니라 장수를 기원한다는 긍정적인 뜻을 덧입혀 ‘수릉’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조선전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수릉제도<SUB>壽陵制度</SUB>가 운영되었다. 조선의 수릉제도는 국왕의 시신을 보관하는 지하공간인 현궁의 구조와 큰 관계가 있었다. 고대사회 이래 전통인 석실<SUB>石室</SUB>로 현궁이 조성될 때는 수릉제도가 무리 없이 운영되었다. 하지만 세조이후 현궁이 석실에서 회격<SUB>灰隔</SUB>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수릉제도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성종 때 관련한 논의가 있은 뒤 수릉제도는 사라졌다.
조선왕릉의 현궁이 석실에서 회격으로 변화한 것은 『주자가례』의 영향이었다. 조선은 주희가 집대성한 주자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했고, 『주자가례』 역시 지배층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신분질서가 강조되었던 조선에서 사대부 예서<SUB>禮書</SUB>인 『주자가례』가 왕실의례에 영향을 준 것은 유학적 의례체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거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현궁 구조는 석실에서 회격으로 전환이 이루어졌고, 결국 수릉제도는 폐기되었다. 이처럼 수릉제도의 운영과 변화는 고대사회의 전통이 주자학적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문화로 전환이 이루어지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조선의 건국과 수릉제도壽陵制度 모색
Ⅲ. 조선 수릉제도壽陵制度의 확립
Ⅳ. 수릉壽陵 논의와 수릉제도壽陵制度의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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