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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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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동방학 동방학 제32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359 - 401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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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古今島) 관왕묘(關王廟)는 정유재란을 기억하는 역사적 상징이다. 본고는 1598년 창건된 이후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어 오늘에 이른 고금도 관왕묘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밝혀냈다첫째, 고금도 관왕묘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파병된 진린(陳璘) 도독과 명나라 수군(水軍)에 의해 1598년 창건되어, 군신(軍神)인 관우(關羽)와 해신(海神)인 마조(媽祖) 등을 함께 배향하였다. 둘째, 고금도 관왕묘는 조선 후기에 묘사(廟祠) 건물의 구조와 향사 대상이 변화된 것이 특징이다. 1598년 정전(正殿)에 관왕과 마조를 모시고 명 수군들의 제향을 받았다. 1666년 정전과 동·서무(東西廡)를 갖춘 品자형 구조였다. 정전에는 관우를 모셨으며 동무에는 진린 도독과 이순신 장군을 함께 배치하여 조선 수군들의 제향을 받았다. 1791년 고금도 관왕묘에 ‘탄보묘(誕報廟)’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묘격(廟格)이 승격되었고, 노량대첩 당시 전사한 명 등자룡(鄧子龍) 장군이 합사되었다. 이에 따라 동무에는 진린 도독과 등자룡 장군이, 서무에는 이순신 장군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40년 고금도 관왕묘는 훼철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이충무공 유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16세기 한·중 문화 교류를 실질적으로 증명하는 문화유산인 고금도 관왕묘가 향후 원형대로 복원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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