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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영주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미술사 제57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85 - 21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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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울 관왕묘에 봉안된 <관우도>가 중국의 전통적인 관우 도상의 수용과 변화를 거쳐 조선식으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글이다. 조선 시대 국가 주도로 건립된 서울의 관왕묘는 총 4곳으로 건립된 시기는 다르지만 건립과 관우도 제작 목적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위중한 사태에 국난의 극복을 위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전반기 선조대에 중국의 요청에 의해 건립된 남묘, 동묘의 <관우도>는 당대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중국에서 유입된 관우도나 삽화가 포함된 『삼국지』류의 소설 등의 도상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관우 도상은 숙종의 어제시 표현대로 큰 키, 대춧빛 붉은 얼굴에 봉황의 눈, 누워있는 누에 같은 눈썹, 삼각으로 길게 뻗은 수염을 하고 청건에 녹색 전포를 입고 지물로는 『춘추』와 청룡언월도를 갖추고 적토마를 곁에 두고 있다. 즉 이 시기 <관우도>의 유형은 유존작과 문헌기록을 통해 보면 3가지로 요약된다. 앞에서 언급한 도상형식을 갖춘 ‘전신 단독상’과 삼국지 주요 이야기가 도상화된 ‘고사인물도상’ 및 윤두서의 작품으로 전하는 ‘반신 성현초상류’로 나눌 수 있다. 또한 ‘甲? 장군상’ 등의 유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근대기 남묘, 동묘 및 고종대에 건립된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는 도상과 성격이 유사하다. 필자는 북묘, 서묘 조각상과 아울러 근대기 사진으로 전하는 관우도상을 적극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서는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가 이전 시기 3가지 유형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분화된 유형과 양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당시 유행한 관성교와 같은 관우를 신앙하는 천수사나 충진사 등의 종교단체나 조직의 경전이나 판화와 같은 인쇄물에 묘사된 관우 도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 관우도상의 특징은 유비, 장비를 같이 그리거나 소나무, 춘추가 올려진 바위 등의 배경에 관평과 주창 등의 협시가 같이 등장하는 ‘삼존상’, 관우와 주창을 그린 ‘이존상’ 및 ‘전신 단독상’, ‘반신상’ 등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반기 관우도가 장군의 모습을 한 무장이나 충신상이 주류였다면 근대기의 관우상은 巫神圖의 성격과 양식으로 제작된 황제나 왕의 복식을 한 군왕상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상인 조각상 뒤에 영정을 걸어 전당을 장엄하였다. 당시 관우상의 복식은 청대의 것을 모방하기보다 조선의 복식과 지물 및 장식, 문양을 융합해 조선화된 관우도를 제작하였다. 특히 익선관, 금관, 빗관, 면류관에 황색, 홍색 곤룡포나 면복 등 고종과 순종의 복식을 형상화한 도상이 주목된다. 근대기 관우도상의 이러한 특징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후 1901년 관왕묘를 관제묘로 격상시키고 악장을 새로 제정하여 관우 신앙을 위태로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왕실 주도로 창건된 관왕묘에 무당을 祭主로 두면서 관우가 武神, 장군신, 재물신 등 기복 신앙의 예배 대상으로 민간층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는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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