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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白種伍 (한국교통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87호
발행연도
2022.5
수록면
33 - 64 (32page)
DOI
10.21490/jskh.2022.5.8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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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옥천 이성산성의 주요 유구인 판축성벽과 석축 집수시설, 목곽시설 등을 중심으로 그 현황과 특징을 정리한 후 이성산성의 조영원리와 그 축성사적 의미를 살펴 보았다. 특히 문헌 기록 속의 ‘石築’, ‘二重’ 이라는 두 키워드는 한국 고대 국가 발전을 표상하고 있으며, 그 전환기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이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한국 성곽 발달사 및 동북아 성곽사에서 볼 때 토축성에서 석축성으로의 터닝 포인트를 간직하고 있다. 옥천지역은 신라의 영역 확장과정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470년의 삼년산성 초축, 486년의 삼년산성과 굴산성 개축, 554년의 관산성 전투 등이 대표적으로 모두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건들이다. 신라의 북진 과정과 한강유역 진출을 통한 대중국 교역로의 확보, 백제의 정벌, 나당전쟁의 승리 등이 모두 옥천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수륙의 결절지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이 크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들 지역의 축성 역시 당대 최고의 역량이 집중된 성곽의 축성술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5세기 후반과 6세기대의 판축공법, 7세기대의 外面築石樣式 등은 그 계기적인 변화를 이성산성에서 발견하게 되었으며 성내 목곽시설과 집수시설, 수혈유구 등도 동시기 고도화된 성내시설이었다는 것에서 이성산성이 가지는 편년적 위치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토축산성에서 석축산성으로 변화하는 시기는 문무왕대부터 신문왕대까지의 치세 기간으로 추정된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을 통한 당군 축출, 백제고지와 고구려 고지의 안정적인 회복, 그리고 영유권 확보 등 대내외적인 안정적 통치를 이룩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신문왕은 9주 5소경과 9서당 10정 같은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제도를 확립하였는데 이때 지방 거점성들의 石築化가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문헌에는 5세기 후반의 굴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중요한 고대 성곽이다. 그리고 고고 자료를 통해 늦어도 6~7세기대의 신라의 판축성벽과 외면축석양상이 명확하게 드러난 첫 유적이다. 그만큼 고대 국가의 발전 단계와 함께 성곽의 발달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이기에 이성산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지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향후 이성산성에 대한 지속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한국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의 대표 유적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已城山城의 城內 施設物 檢討
3. 已城山城의 造營 原理와 築城史的 意味
4. 맺는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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