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성희 (한양대학교)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38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53 - 87 (3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5∼6세기 유연과 북위 관계의 변화상은 주변 세력의 정치적 역학관계와 맞물려 시간적 추이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여 시기적 특수성을 구명하는데 유효한 장치였다. 5∼6세기의 북중국은 분열의 시기이자 수당 통일제국으로 가는 과도기였다. 이 시기 동안 양국은 대척점에 선 적대 세력인 동시에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공조의 상대였다. 양국의 서로에 대한 대응은 그런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그들의 유목적 속성과 더불어 대내외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5세기 초 이래 전방위적으로 세력 확대에 나선 유연은 계속적으로 북위의 변경을 침략했고 이에 대한 북위의 대응은 430년을 전후한 시점까지는 황제의 친정을 포함한 정벌이 주를 이루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북위는 영토 확장에 상대적으로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유연의 근거지였던 막북 일대의 열악한 환경이 원인의 하나였다. 당시 북위에게는 유연 정벌을 통한 영토의 확장보다는 화북 통일을 포함해 대외 정벌을 위한 군비의 충당이나 물자의 확보가 더 시급했을 것이다. 양국 관계는 신가 4년(431)을 전후해 다시 한번 변화하게 된다. 유연은 이 시점을 전후해 침략 일변도에서 벗어나 사신 파견이나 혼인 관계 요청 등의 유화책을 부분적으로 썼다. 북위 공략을 위해 공조했던 북연과 북량의 멸망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북위 역시 유연의 침략에 대한 방어적 대응 외에 羈?와 按撫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장성과 군진을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의 구축도 병행했다. 그러면서도 북위는 여전히 새로운 영토 확보를 위한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적에 대한 추격 역시 막북까지 진격하는 선에서 멈췄다. 이미 막남을 세력권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사회체제의 변화를 경험한 그들에게는 막북 일대로의 영토 확장이 과거와 달리 그리 유의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빈번하게 나타나는 북방의 기후 이변도 그들이 막북으로의 진격과 경략을 주저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5세기 중후반, 유연의 가한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장성을 침범하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유연의 지배자들은 가한을 칭한 후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 유연은 북위의 계속되는 정벌로 좀처럼 침략의 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서역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한 결과 동서 교통의 요충이자 물산이 풍부한 이오를 경략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남조, 고구려와의 새로운 공조 관계를 모색했다. 유연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북위는 정벌과 인축의 획득 등 기존의 대응 방식 외에 무형의 제재를 가했다. 유연의 지배자들이 가한을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데 대해 경고했다. 유연의 계속되는 구혼을 거절하거나 번신의 예를 강요한 것이 그 예이다. 그들의 행위를 북위 중심의 국제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북위의 이러한 대응은 효문제 시기를 전후해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교 이념의 수용 및 한화의 추진과 무관하지 않다. 유연이 북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남조, 고구려와 연계해 북위에 대한 협공을 시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연 가한들의 독자적인 연호 제정은 한편으로는 유연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을 가능성이 있다. 가한의 교체가 빈번한 가운데 유연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던 고차가 독립하면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남조, 고구려와의 연대 역시 북위에 타격을 줄 만큼 견고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유연의 전략 수정은 불가피했다. 지속적으로 북위에 화평 요구를 하는 한편 북위와의 관계에서도 과거와 달리 자신들을 臣으로 지칭하면서 번신의 예를 다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이러한 태세 전환은 그들의 활동 영역이 막남으로 확대되고 계속되는 旱災로 식량이 부족해진 측면도 부분적으로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북위의 대응 역시 과거와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정벌 위주의 대응에서 벗어나 그들을 번병으로 대우하고 요구 사항을 들어주면서 북변의 안정을 추구하려 했다. 효문제 태화 연간을 기점으로 낙양 천도를 단행하고 남벌을 계속하면서 상대적으로 북변 수비에 대한 비중이 줄어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유연에 대한 전면 공세 대신 장성 축조 등의 상설 방어체제의 구축을 타진하는 한편 귀부한 고차를 북변 방어에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6세기 전반을 전후해 유연과 북위 모두 세력 약화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양국은 각자의 불안정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피상적인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