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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인호 (동의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1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5 - 56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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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경기도가 주도한 경성은사수산장(은사수산경성기업장과 은사수산경성제사장)을 연구대상으로 수산장 사업의 전개과정과 사업의 실상, 재정 운영상황 등을 분석하였다. 경성은사수산기업장은 1911년 4월 1일, 제사장은 1915년 6월 1일 각각 설립되어 1924년 3월 31일부로 은사수산사업에서 탈락하였고, 이후 기업장은 경성부수산장으로, 제사장은 경성제사장특별회계로 유지되었지만 1929년도 회계를 끝으로 1930년 3월 31일부로 모두 폐장하였다. 1923년을 기준으로 두 수산장의 예산안이 합해서 44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나름 규모를 가진 은사수산장이었다. 기업장보다는 제사장의 예산규모가 커서 1926년의 예산은 541,405원에 달하였다. 문제는 제사장이나 기업장의 예산은 팽창하는데 사업 성과는 미미하였고, 계속해서 거액의 예산이 들어가는 이유로 경기도는 늘 수산장 사업을 민간불하하고 싶어 했다. 1920년 이래 틈만 나면 경기도나 총독부 당국자들은 조선인 유지에게 제사장을 불하한다느니, 민간이양을 통해서 공장을 키운다느니 하면서 소문을 흘렸다. 그러나 예산이 들어간 것을 조선인에게 불하하기 만무하였고, 결국 자금부족을 이유로 기업장은 경성부에 넘기고, 제사장은 자금을 줄여서 특별회계로 정리과정을 밟았다. 한마디로 조선인에 대해선 ‘성의 없는’ 수산장 사업이었다. 은사수산장 사업으로 1910년대 아직 기계제 방직공업이 발전하고 있지 않을 때 은사금공채이자를 들여서 새로운 산업기풍을 도입하는데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여기서 성장한 기술인력이 20년대 이후 잠업, 방직업을 넘어 다양한 산업방면으로 진출하여 조선인의 근대적 성장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성은사수산장은 처음부터 양반, 유생 등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장은 늘 총독부 상공과 소속 기사(技師)가 겸직하는 ‘주인 없는 공기업’이었다. 오히려 직원들도 경기도 산업부의 명령체계 아래서 창의적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고, 관권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애시당초 시장에 적응하는 플랜이나 자생력을 키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불황이 오면 무기력했고, 맷집없이 몸집만 키워진 결과 가뜩이나 열악한 경기도지방비를 시시각각 축내었다. 오로지 효용이라곤 조선시찰단 방문시 천황의 은혜와 식민통치의 성과를 자랑하는데 홍보 시설로 기능하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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