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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2호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67 - 10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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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약 15만여 일본군의 침략으로 왕이 피란하고,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가 점령될 정도로 조선의 국방상태가 나약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조선 전역이 일본군에 유린된 가운데 보전된 전라도는 국가의 보장으로서 근왕활동 및 타지에 대한 병력의 부원, 군량·군수물자 공급 등을 담당하게 되면서 엄청난 병력과 물력이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은 전라도수군 운영에도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으니 병력·물자의 징발이 무분별하게 나타나 수군조직에 크고 작은 변동이 야기되고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났던 것이다. 전라도가 전란극복의 주축이 된 가운데, 수군이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시 남해안에서 활약한 수군은 충청·전라·경상의 삼도 수군이 있었지만, 전라도수군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수군의 활동을 논함에 있어서 이순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로서 첫째는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면서 수군 전체를 통솔하였기 때문인데, 전라좌수사로서 전라도수군의 실상 뿐만 아니라 삼도수군 운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의 『난중일기』 및 『임진장초』에 수군의 상황 및 운용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시 조선의 국방체제는 제승방략의 분군법을 기본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제승방략의 시행 시점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16세기 왜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정착되었는데, 남방에 있어서는 을묘왜변을 전후하여 실시되었다. 이로 인해 수군절도사는 기존 수군진 뿐만 아니라 연해제읍 수령까지 지휘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해상방어가 강화되었다. 제승방략은 관습적으로 전해진 것으로서 법제화 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임진왜란시 전라도수군의 편제는 이순신의 『일기』 및 『장계』 등의 기록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전라좌수군 5관 5포, 전라우수군 14관 12포로 구성된 현황을 정확히 밝히고 연해제읍의 역대 고을수령 및 수군진 장수를 가능한 한 규명하여 정리하였다. 이러한 수군의 규모와 활동 인물들을 기반으로 수군의 활동양상과 군사 동원체제의 실상을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이전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육전 위주의 방어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예상과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으니 일본 수군보다 조선의 수군이 우월함을 확인하였고,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수군을 강화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전선을 넉넉히 만들라’는 수군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수군역은 고역으로 인식되어 징발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조정의 또 다른 정책으로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그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제하라’는 연좌제를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정책은 백성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수군의 전투수행 및 전선건조를 위한 군사징발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조정의 두 가지 명령은 상호 모순된 것으로서 수군운영상의 문제가 되었다. 수군 운영의 또 다른 문제는 제읍수군의 동원을 둘러싼 육군과의 갈등이었다. 제승방략에 따라 수군으로 편성된 연해지역 고을로서 전라좌도 5관, 전라우도 14관이 있었으나 전라우도 14관은 임진왜란 초부터 근왕군에 동원되거나 의병과 연합하면서 육상전에 임하였다. 전라좌도의 일부 고을수령은 1593년을 전후하여 육상전으로 동원되었는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이러한 상황을 조정에 장계하여 수군소속 고을은 해전에만 임하고 육전에 투입하지 못하도록 요청하였다. 수사 휘하의 연해지역 고을이었지만 명령에 응하지 않아 통제하기 어려웠고 군무에 있어서 병사와 관찰사의 권한과 중첩되거나 상관으로서 관찰사의 지휘권이 우선시 되면서 지휘체계에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대체로 병사는 육군을, 수사는 수군을 관장하며 관찰사는 이들의 상관으로서 감찰·지휘하는 입장이었는데, 이순신은 왕에게 장계를 올려 고을 수령에 대한 지휘권을 병사와 관찰사에 준하여 요청하였다. 그 권한은 고을 수령들에 대하여 처벌권을 동반한 군병점고, 군사징취, 응적동군 등이었다. 고을 수령들은 수군진 장수와 달리 군정과 민정을 겸하였기 때문에 관찰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순신은 수사가 이 모든 것을 관장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휘체계로 인한 수군과 육군 간의 갈등은 이정암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이정암은 1593년 11월 경 전라좌수군 5읍과 전라우수군 14읍을 개편하여 전라우수군 9읍을 육군으로 이속하였다. 군사편제를 개편한 이유로서 첫째는 2차 진주성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일본군이 전라도지역을 침범하게 되면서 해당 지역에 방어진 구축을 위한 것이었으며, 둘째는 도내 요해처에 산성을 수축하여 유사시 수성전을 펼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에 필요한 병력을 수군 개편을 통해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에 육군으로 이속된 전라우수군 소속 9읍을 복구하기 위해 이순신은 여러 차례 장계를 올렸다. 1594년 10월 경 전라우수군 9읍 가운데 5읍이 복구되었고 1597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전라우수군 14읍이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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