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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유연성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67호
발행연도
2023.3
수록면
193 - 22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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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1593년부터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강화 교섭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1597년에 전쟁이 재발하였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와는 다르게 전라도 지역 점령을 전략 목적으로 세웠다. 조선은 여러 첩보들을 통해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조선은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명나라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고 병력을 파견하였다. 조선도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의 주요 진격로인 경상도 일대에 병력을 주둔시켜 대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전라도 지역의 침입 첩보에 따라 남원과 전라도 주요 길목에 병력을 주둔시켜 방어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에서 파견 된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병력 3천을 이끌고 남원에 내려가 성벽 보수에 들어가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한다. 1597년 7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였고, 일본군은 전라도로 향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경상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대다수가 산성을 버리고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전라도까지 빠르게 진격하였다. 일본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향하면서 지역 방어를 담당했던 병사 이복남(李福男)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담양의 금성에 머물던 조방장 김경로(金敬老)와 합류하였다. 전라도를 지키던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남원에 모였으며, 일본군도 남원으로 진격하였다. 3일간의 전투에서 남원을 지키던 명나라군과 조선군은 패배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를 연이어 함락시키고 충청도를 통해 한성으로 올라가려다 직산에서 명군에게 패배 한 뒤 철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도 점령당하지 않았던 전라도 지역은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얼마 못가 일본군에 점령당했다. 이와 같이 조선이 전라도 지역의 방어에 실패한 원인은 5가지가 있다. 일본에 포로로 갔다 온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과 전쟁 상황을 통해 그 원인을 분석했다. 첫 번째는 지휘관의 잦은 교체였다. 두 번째는 지역 내 병력 동원과 산성 운영의 문제였다. 세 번째는 전라도 각 부군현 수령의 부재였다. 네 번째는 방어 전략의 실패였다. 다섯 번째는 명나라군에 대한 의존과 지휘권의 이양이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정유재란 시기 전라도 지역은 일본군에 침입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점령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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