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현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44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67 - 94 (2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壬辰倭亂(壬辰戰爭)은 사건 발발 이래 조·일 관계를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학자들은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최근에는 중국 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뛰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동아시아 국제전쟁’에서도, 오래 전부터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와 여러 학설이 존재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학술사도 상당 부분 축적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動因을 찾아내는 데 주목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을 다각화해서 살펴보는 데 기여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한일을 막론하고 ‘협상가 히데요시’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또한 히데요시 치정의 일부로 평가해야 함에도, 임진왜란 연구는 히데요시 집권기의 유기적인 상황에서 다루기보다는, 임진왜란에 일본이 총력을 기울였다는 전제 하에 ‘임진왜란만을 분석대상에 놓고’ 출발하였다. 히데요시의 도해 계획도 마찬가지로 대개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상황보고’의 일부로 다루어져 왔다. 본고에서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을 보장받는 수단으로 조선 도해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 계획은 皇胤設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이었지만, ‘태양의 아들[日輪の子] 히데요시’는 예기치 못했던 天皇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히데요시가 天皇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만큼, 그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도해 연기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히데요시는 이 논리를 天皇이 자신의 도해에 반대하기 때문에 당장 시행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도해할 뜻이 계속 있다고 하여 天皇과 자신의 뜻을 차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天皇의 예려 활용은 조선 도해를 추진하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후 히데요시는 일본국왕 책봉을 계기로 다른 논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집권 초에 사용하던 天皇의 勅命과 叡慮에 기반했던 권위를 응용하여, 明 天子를 끌여들여 조선 도해를 가능하게 할 ‘예려’로 전환하려 했다. 결국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줄 수 있는 대상을 더 많이 만들어냈고, 그를 대내외 양면에서도 인정하게 하는 데까지도 성공하였다. 이에야스 역시 이러한 ‘새로운 권위’를 활용할 수 있는 책봉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명과 조선 모두 히데요시의 선례가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책봉 요청을 묵살하였다. 결국 이에야스는 책봉을 포기하고 바쿠후 체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러한 히데요시의 논법은 일본 天皇이나 일본의 天下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권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자신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게 할 권위를 원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정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고 또한 변용하는 장으로 볼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