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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효정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51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225 - 25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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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로 새로운 외교 체제에 편입된 조선은, 일본의 정세 탐색과 세관 등의 문제로 1880년 제2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동안 이 수신사는 주로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연관하여 연구되어지거나, 정사 김홍집 개인의 정치활동 중 일부분으로 간략히 언급되었다. 이는 제2차 수신사의 자료가 산재되어 연구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이를 고려하여 박상식의 『동도일사』, 김홍집의 『수신사일기』, 『흥아회보고』 그리고 당시의 일본 신문을 바탕으로 실제 제2차 수신사가 일본에서 무엇을 어떻게 견문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동도일사』에서 일기를 썼던 향서기 박상식은 기존의 중화주의적 시선으로 일본인들을 바라보았으며, 근대 문물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수신정사 김홍집도 흔히 개화파라 일컬어지지만 일본에서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유람을 권하는 일본인들을 거절하며 견문을 공적인 신분으로는 할 수 없다고 하고, 대신 수행원을 보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귀국 후의 보고서에는 세계 정세와 교육체계, 근대식 군대, 재정 문제 등 경험한 견문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비록 수동적인 견문 활동이었지만 이러한 경험이 후에 그의 온건적 개화 정책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또한 고위 관료나 민간의 지식인 등 다양한 일본인 그리고 청국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교유의 모습은 통신사 시절의 필담 창수와 다르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한문으로 된 글씨와 시를 얻기 원하였으며 한시를 창수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는 일본에서 아시아연대론이 급부상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중화 문명의 공통 교양은 이 아시아주의의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근대 서양에 맞서기 위한 이들의 논리 역시 ‘부국’과 ‘개화’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한문’이 아닌, 중국어와 조선어 등의 자국어를 배워야 했으며 사대교린 체제에서 벗어나 ‘자주권’을 지켜야 했다. 이러한 역설적 인식의 경험들, 문화공동체의 균열 경험이 결국 제2차 수신사 이후의 대외수교, 개화정책에 일정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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