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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용필 (한국사학연구소)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9호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115 - 14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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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후일의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김법민(후일의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은, 그의 아버지와 동생이 왕위에 오르기 이전인 진덕여왕 5년(651) 처음으로 入唐하여 宿衛하였다. 이후 그는 6번의 귀국과 입당을 반복하며 도합 22년 동안 在唐하다가 증손인 효소왕 3년(694) 당에서 사망하였고 시신으로 귀국하여 경주에 묻혔다. 이러한 김인문은 유교는 물론이고 도교 및 불교까지 섭렵하였음이 그의 傳記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가 이같이 유ㆍ도ㆍ불 삼교에 정통했음은 中國 魏晉南北朝 시대 이후 당시 唐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양상과 같았다. 그가 어려서 신라에서 공부할 때에는 유교를 위주로 삼다가 특히 입당 이후에는 “겸하여 장자ㆍ노자ㆍ불교의 학설도 섭렵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굳이 ‘莊老’라 한 것은, 그가 장자 를 노자 보다 더 중시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된다. 한편 그의 개인 碑文에서 “天人의 □□을 접하였다.’라고 했음에서, 이 ‘천인’이 노자 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장자 중 「天下」篇에서만 찾아진다. 따라서 그가 장자 를 수용하면서 특히 이 「천하」편에 높은 비중을 두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唐이 百濟를 정복하고 세운 비문에서 그에 관하여 “小人의 자잘한 행위는 없었고 君子의 孤高한 風貌가 있었다.”라고 기술한 바는 곧 그의 ‘군자’다움의 要諦가 바로 그가 수용한 장자 「外物」편에 근거하는 바였음을 입증해준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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