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상익 (부산교육대학교)
저널정보
(사)율곡연구원(구 사단법인 율곡학회) 율곡학연구 율곡학연구 제57권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5 - 36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준경은 선조 5년(1572) 7월 유차(遺箚)를 올려 ‘사사로운 붕당을 타파하라’고 요청했는데, 율곡은 이준경의 주장을 적극 반박했다. 율곡도 당시 정국을 ‘두 세력 사이에 알력이 존재하는 상황’으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이 이준경을 비판한 것은 ‘붕당’이라는 말이 지니는 위험성 때문이었다. 소인들은 군자를 공격할 때 ‘붕당’이라고 지목하여 일망타진의 빌미로 삼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율곡은 ‘붕당’이라는 말 자체를 극도로 경계한 것이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은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전개하면서 양측을 ‘조제보합(調劑保合)’하고자 했다. 조제보합을 위해서는 양측을 모두 군자로 간주해야 했으며, 만약 ‘어느 한쪽이 옳고, 한쪽은 그르다’는 입장을 고수한다면 조제보합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측이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버티면서, 이후 조선의 정치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 구도로 고착되었고,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당동벌이(黨同伐異)가 횡행하여 공론정치는 실종되었다. 율곡은 ‘동인과 서인이 모두 군자’라는 관점을 고수하고자 했는데, 이는 내부에 대립과 불화를 지니고 있는 정치체가 건전하게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양쪽이 서로 당동벌이를 일삼게 되었다면, 이제는 다른 관점과 접근법이 필요한 것이다. 율곡은 만년에 사림의 정국 주도권을 수긍하지 않고, 선조에게 만기총람(萬機總攬)을 요청했다. 이로써 공론정치라는 율곡의 정치적 이상은 율곡 스스로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