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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동양정치사상사 제6권 제1호
발행연도
2007.3
수록면
163 - 187 (26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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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사후 63년간의 세도정치기(1800-1863)는 견제장치 없는 권력구조와 정치보복의 악순환,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도미노, 거듭되는 기근과 질병 등 ‘우리 역사의 암흑기’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세도정치기가 외형적으로 볼 때 그 이전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연이은 가뭄과 홍수, 빈번한 이양선의 출몰과 천주교의 확산, 그칠 줄 모르는 정쟁 등 국가가 헤쳐 나가야 할 과제도 비슷했다. 국왕의 일과도 다를 게 없었다. 시간과 공간의 구획에 맞추어 움직이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모습도 정조시대와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대응방식의 차이였다.
‘정치하는 방식’에 있어서 세도정권의 특징은 의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정책들은 외척 세도가로 구성된 비변사에서 사전 결정되었다. 국왕이 주재하는 어전회의는 대부분 정적을 ‘박격(搏擊)’하는 성토장에 불과했다. 천주교 탄압으로 시작된 장기간의 ‘공안정국’에서 조선왕조를 장기간 지탱시킨 토론과 비판의 정치전통도 실종되었다. 조정의 뜰에 서서 소리쳐 간쟁하는 정쟁(庭諍), 면전에서 잘못된 주장을 꺾어치우는 면절(面折), 임금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대궐의 난간을 부러뜨리면서까지 간언하는 견거(牽?)와 절함(折檻)의 전통은 아득한 옛날이야기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면 순조 초반의 핵심 인물이었던 대왕대비, 국왕, 외척세도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정국을 이끌어나갔는가? 벽파의 상징적 인물로 간주된 대왕대비 정순 왕후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그리고 영조와 정조의 관료제 개혁, 즉 관료제 기강확립을 내세운 이조전랑제의 혁파와 대신권(大臣權)의 강화와 같은 개혁조치로 약화된 언관들의 정치비판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가? 그리고 견제 받지 않는 소수의 외척 세력이 좌우지하는 정치상황에 대해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런 일련의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목차

논문요약
Ⅰ. 序: 世道와 勢道
Ⅱ. 세도정치기 정국구도와 운영방식의 특징
Ⅲ. 공론정치의 무력화와 공론의 부재
Ⅳ. 맺는 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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