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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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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4집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179 - 21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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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연구에서 여진족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미미하다. 그러나 임진왜란기를 『선조실록』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면 첫째 ‘南倭北虜’的 위기상황이라고 조선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남왜’와 전쟁한 것만이 아니었다. 동북방과 서북방의 ‘북로’와도 첨예하게 대립한 상황이었다. 남북으로 적을 맞고 있다고(‘腹背受敵’) 인식하고 남북으로 환난을 당하고 있다고(‘腹背之患’)우려하여 그 극복에 분망하고 있었다.
둘째, ‘남왜’와 ‘북로’는 한 쪽 톱니바퀴가 돌아가면 그 톱니에 물려 다른 또 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그야말로 連動的인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남왜’가 큰 톱니바퀴였을 따름이다. 1595년 10월, 남방에서 활약중인 경상우도별장 한명련과 의병장 김덕령을 서북방의 장수로 차송하려 하거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를 시켜 휘하의 항왜들을 인솔하여 북방으로 가 지키게 하려했던 것은 당시 상황이 ‘남왜’보다 ‘북로’가 더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셋째, 임진왜란기 군량을 포함한 물량적 측면에서 ‘북로’와의 관계도 그 한 축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선 군사보다도 군량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그나마 확보한 군량도 명군에게 공급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므로 조선군의 전투력은 약화일로였고 전국의 백성들은 아사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동북방 여진에 대한 회 유책으로 물품 지급이 종종 논의하고 있고 실제로 지급되기도 한다.
이처럼 왜란기 ‘북로’는 정신적?물질적으로 조선의 對日 총력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南倭北虜‘的 위기 인식
3. 누르하치에 대한 위기의식과 대응책
4. 동북방 여진에 대한 위기의식과 대응책
5. 여진족에의 降倭 이용
6. 맺음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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