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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민호 (홍익대학교)
저널정보
국어국문학회 국어국문학 국어국문학 제173호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181 - 206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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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조선"이라는 왕정 중심 국가의 잔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대한제국의 시대로부터 국권상실을 겪은 일제강점기로 이행했던 일련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 등장한 문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주체들이 겪었던 관계의 부침 양상을 살피는 것은 퍽 유효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교유(交遊)"라는 친분의 양상이 단순한 관계적 친밀성을 드러내는 의미만이 아니라 신분상이나 학연적 연결고리를 의미하면서 사상적 지향의 단초를 해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던 대한제국 이전의 사회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시기가 전통적인 양반 계층이 균열하고 난 뒤, 외부 세계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새로운 지식인들이 등장하여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이긴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의 교유양상은 단지 학회 같은 지식 그룹의 친소 관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문이나 친분 등 보다 복잡한 교착의 양상을 띠고 등장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전 시대의 그것보다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복잡한 이 시대의 교유 양상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근대의 전환기에 있어 이전에는 통합되리라고 생각될 수 없었던, 예를 들어 전통적인 양반들의 유교적 삶의 방식과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사이의 관계적 중첩 같은 다양한 이항대립적인 가치들이 혼재하면서 공존했던 흥미로운 양상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외교가이자 관료였던 김윤식과 개화기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였던 이해조 사이에 존재했던 교유의 양상과 사상적 영향 관계를 밝히고자 하는 시도의 첫 번째 작업으로, 1907년 무렵부터 1910년 이후까지 둘 사이에 근대학교와 학회를 매개로 존재하였던 교유의 양상을 추적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 글에서는 특히 지금까지 논의의 중심에 놓인 바 없었던 이해조가 돈명의숙에서 기호학교로 옮기게 되는 정황에 대해 이를 당시 기호흥학회의 회장이었던 김윤식의 영향 하에서 살펴보았으며, 나아가 당시 한성부민회의 산하 조직이었던 정경방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보광학교의 인수 과정에서 당시 정경방회(정경민단)의 회장이었던 김윤식과 해당 회의 회원이었던 이해조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움직인 바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신구 지식인들 사이의 교유의 내력과 계기 : 기호흥학회 활동의 전후
3. 근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중심으로 한 관계의 형성 : 돈명의숙으로부터 기호학교로
4. 방회 활동을 통한 정치성의 구체화 : 정경방회와 보광학교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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