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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유라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우리한문학회 漢文學報 漢文學報 제35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3 - 44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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鳴巖 李海朝(1660∼1711)는 환국을 거듭한 숙종 조에 활동한 문인으로 月沙 李廷龜(1564∼1635) 이래 3대에 걸쳐 문형을 배출한 집안의 후손이다. 선조만큼의 文名을 드날린 것은 아니지만 현전하는 그의 문집에는 시인적 재능과 작가적 개성이 드러나는 여러 작품이 남아 있다. 이해조의 문집인 『鳴巖集』에는 430여 수의 시가 전하는데 대부분 그가 일생동안 山水探勝을 즐기면서 그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들이다. 이해조 본연의 시인적 자질뿐만 아니라 農巖 金昌協·三淵 金昌翕을 비롯한 당대 시문단의 주요 인사들과의 교유를 통한 문학적 영향 또한 남아있어 17·18세기 시단의 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이해조의 시를 살펴보는데 있어 가장 아쉬운 지점이라고 한다면 시편 외에는 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의식을 파악할 만한 이해조 본인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해조가 평생 從遊하며 隨時聞學하였던 김창흡의 기록을 통해 이해조의 시가 어떤 점을 지향하였는지 유추하였다. 그 결과 이해조는 언어의 조탁에 전념하여 미사여구에만 골몰하는 당시 시풍을 배척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시를 지었던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唐詩의 격조나 宋詩의 풍격에 얽매여 조탁하거나 답습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풍격이 묻어나도록 하는 것이 그가 시에서 고수한 기준이자 원칙이었다. 이해조의 作詩는 ‘逼眞’과 ‘摸奇’를 중점으로 하였다. 이해조는 전대 문인들이 노정한 폐단을 비판하면서 당시 유입된 명말 문예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파의 복고가 난삽한 고어로 변개되는 것과 공안파의 眞情의 결핍을 경계했던 삼연의 시론을 적극 수용하여 ‘逼眞’과 ‘摸奇’를 추구하는 作詩 경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해조의 作詩 경향은 명대 의고파와 공안파의 문예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던 백악시단의 시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일면 그 詩脈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17,18세기 조선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고 문단에 있어서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해조는 그 시기를 살아가면서 변화의 중심에 있던 이들과 교유하였다. 거기서 받은 문학적 영향은 그의 시편에서 그 영향관계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편은 문학적 비평 교유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作詩 의식에서 보이는 진실한 성정의 발현과 기이함의 참신한 모사의 특징은 17,18세기 농암·삼연을 주축으로 시작된 새로운 문학 풍조의 일면을 보여준다. 더불어 시와 국문문학의 교섭을 시도한 점이나 지역 정보를 결합하여 다시 새로운 독립적 작품을 탄생시킨 점 등은 18세기 한시의 多岐한 면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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