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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준호 (웅지세무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52輯
발행연도
2018.8
수록면
243 - 275 (33page)
DOI
10.37981/hjhrisu.2018.08.5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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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懲毖錄』은 영의정과 도체찰사를 역임한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사적을 기록한 當代史로,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자료이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 사신의 왕래와 통신사 파견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조실록』에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징비록』은 관찬 사서의 사료적 미비점을 보완해주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징비록』은 간행 직후부터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들이 『선조수정실록』을 간행할 때 『징비록』은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었다. 특히 『선조수정실록』에 『징비록』의 대일관계와 조선 조정의 전란 대비책과 관련된 기사가 그대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징비록』의 기사가 『선조수정실록』에 다수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넘어 유성룡이 서인으로부터 전란기의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이익과 이긍익 그리고 한치윤은 그들의 저서에서 임진왜란 관련 기사들을 기술하는 데 『징비록』을 중요한 자료로 인용・활용하였다. 특히 이익은 『징비록』을 통해 자신의 성곽론을 완성하였고, 한치윤은 유성룡의 병기관을 계승・발전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징비록』은 조선 후기의 역사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조선 후기 대일관계가 정상화되면서, 통신사가 참고했던 서적도 『징비록』이었다.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인물들이 남긴 사행록에 『징비록』을 언급한 것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즉 통신사 파견의 전례라고 할 수 있는 경인통신사의 사행과 관련된 내용이 『징비록』에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사행과 교린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범서로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징비록』이 조선 후기 정치・사회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징비록』은 조정으로부터 그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 유출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징비록』은 일본에 유출되어 일본의 학계와 출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18세기초 징비록은 姜沆의 『看羊錄』 등과 함께 오사카에서 출판되었다. 일본의 유학자인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은 구로다[黑田] 가문의 家譜를 정리하는데 징비록은 인용하였고,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도 자신의 이칭일본전에 『징비록』을 소개하였다. 이러한 계기로 『징비록』은 일본의 독서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듯 『징비록』은 일본 학술계에 임진왜란 관련 사적을 정리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인용되었고, 그 내용과 상관없이 상업 소설의 제목으로 『懲毖錄』이 차용되기도 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일본의 근세 문화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도 전해지기도 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宣祖修正實錄』에 수록된 『懲毖錄』 기사의 檢討
3. 『懲毖錄』에 대한 朝鮮에서의 영향과 평가
4. 『懲毖錄』의 流出과 日本에 끼친 영향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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