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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형목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29권
발행연도
2018.8
수록면
41 - 78 (38page)
DOI
10.46331/jis.2018.08.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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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 합일학교는 선교사업 일환으로 1900년 잠두의숙에서 시작되었다. 설립자는 선교사 조원시와 신자인 박능일·김상임 등이었다. 이를 계기로 계명의숙과 보창학교(육영학원)가 설립되는 등 강화지역 근대교육은 구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맞았다. 특히 강화진위대장에서 사임한 이동휘는 의무교육 시행을 위한 강화학무회를 조직하였다. 도내에 운영되는 교육기관은 보창학교지교로 재편하는 등 56개 학구로 조정했다. 이리하여 대한제국기 강화도는 민족교육 ‘요람지’로서 부각되었다.
「사립학교령」시행에 즈음하여 교명은 사립합일학교 바꾸는 동시에 교육내실화를 도모하였다. 주민들은 생활 정도에 따라 ‘의무교육비’를 흔쾌히 내놓았다. 인근 황해도와 경기도 지역에 소재한 교육기관과 연합운동회는 상무정신과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현장이었다. 1만여 명이나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연합운동회는 그야말로 대장관을 연출하였다.
강제병합 이후 식민지 노예교육에도 합일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거듭났다. 3·1운동 당시 본교 출신들은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등 사회적인 책무를 다했다. 당시 시위군중은 2만여 명에 달할 정도로 전국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기록을 남겼다. 이는 강화인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부문별 민족해방운동을 진전시키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1920년대 중반 재정적인 빈궁으로 합일학교는 폐교라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선교사들은 학교운영비를 제대로 충원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입장이었다. 지역 명망가들과 합일학교 학부형회·동창회 등은 직접 학교 운영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부호인 최상현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함으로 합일학교를 새롭게 탄생시켰다. 본교 출신자들도 명예교사로 지원하는 등 교육내실화는 물론 교육시설 확충으로 이어졌다. 교장으로 취임한 처남 오영섭의 열정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리하여 강화도를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은 바로 합일학교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해방 이후에는 공립학교로 전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합일학교는 강화인의 근대교육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적인 산물이다. 동시에 식민지 교육정책과 선교사업의 양면성도 엿볼 수 있다. 이 학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진다. 곧 합일학교는 강화지역 근대교육사는 물론 한국 근대교육운동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지역 기독교 수용과 인식변화
Ⅲ. 근대교육 태동과 사립 합일학교로 발전
Ⅳ. 일제강점기 합일학교의 운영 실태
Ⅴ. 운영주체와 근대교육사에서 위상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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