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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제정 (경상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67輯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317 - 348 (32page)
DOI
10.31335/HPTS.2018.11.67.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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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즈미는 명문가 출신으로 유명하다. 학계와 관계, 그리고 경제계를 아우르는 호즈미의 집안 배경은 조선총독부 관료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호즈미는 조선 내의 어려운 일뿐만 아니라 일본 본국과의 갈등이 있을 때에도 일본 내의 광범한 인맥을 바탕으로 이를 해결하곤 하였다. 호즈미의 집안 배경은 본국의 관리 및 경제계 인사들과의 관계에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관리로서의 처지를 만회해주는 것이었다.
호즈미는 1914년 조선총독부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나, 일본의 한국병합정책과 동화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인의 민족성도 사대주의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학무와 경무의 일을 기피하고, 상업 · 공업 · 광업 · 수산업을 담당하는 식산국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식산국장 재임기간 동안 추진한 주요 사안은 조선공업화 정책이었고, 중요산업통제법의 조선 시행 문제가 일본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되었다. 호즈미는 일본 자본의 유치를 둘러싸고는 만주지역과 경쟁의식을 가졌고, 조선 본위와 조선특수성을 주장하며 중요산업통제법을 조선에 시행하려는 본국 정부와 대립하였다.
일본 정부와 군부와의 대립으로 호즈미는 1941년 11월에 조선총독부를 사직하였다. 그 후 호즈미는 민간기업 중역과 경제단체 임원이 되었는데, 이는 ‘토착형’ 관료의 전형적인 코스였다. 호즈미와 같은 ‘토착형’ 관료들은 ‘본국형’ 관리들과의 구분 의식이 있었고, 정책적 측면에서도 차별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호즈미의 사직에는 전시체기 총독과 정무총감을 따라 들어온 만주계 이입관리들과의 갈등이 하나의 요인이었다.
호즈미는 해방 이후 京城日本人世話會회장으로 추대되어, 재조일본인들을 지원하고 이들이 일본으로 귀환하는 것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1946년 4월 5일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과 관련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朝鮮引揚同胞世話會 회장을 하던 중 1947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 조선 귀환 관계자들에 의해 추대되어 참의원의원 전국구로 입후보, 당선되었다. 또한 中央日韓協會와 友邦協會의 창립을 주도하여 각각 부회장과 이사장을 지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호즈미의 집안 배경과 조선 인식
Ⅲ. 조선총독부 ‘토착형’ 관료로서의 호즈미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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