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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다미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89輯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43 - 7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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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가 되면 향촌사회에서 사족들은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향권’을 장악하기 위한 거점지로 서원을 활용하였으며, 그 결과 서원은 ‘향권’을 둘러싼 양반 사족들의 격쟁의 전초지가 되었다. 특히 18세기 이후가 되면 경제적 기반의 약화와 중앙집권 체제 강화로 인한 양반층의 분열이 심화되었고, 향전은 신향과 구향의 충돌로 이어졌다. 향촌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문중사회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부여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여현의 ‘향권경쟁’은 양란 이후 유입된 세거사족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나타났으며, 그 중심에 부산서원이 있었다.
숙종 47년(1719)에 완공된 부산서원은 김집・이경여를 배향한 서원으로 부여현의 재지사족들과 중앙의 공조 하에 건립된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었다. 따라서 부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족들의 서원 활동 속에는 부여현에 산재한 사족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부여현의 재지사족들 사이의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권 경쟁’은 서원의 건립 과정, 운영과정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서원 활동’ 과정 속에서 드러났다.
18세기 이후 19세기가 되면서 서원은 일종에 ‘향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황옥을 중심으로 한 부여현의 재지사족들은 1789년 『부여향안』을 중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원향지가’를 향안 입록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원향지가’의 개념을 부각시킨 것은 향안 입록기준을 세우기 위한 단순한 목적이 아니었다. 이는 18세기 이후 심화된 ‘모록’ 현상에 대응하기 위한 부여현 재지사족의 ‘생존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부여현 사족들의 입향과 정착
3. 부산서원의 건립과정과 운영양상
4. 부여향안 중수와 ‘原鄕之家’의 개념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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