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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62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5 - 4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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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환곡은 삼정의 하나로서 운영되면서 국가재정에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였고, 일반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비슷한 양상이지만 특히 경상도는 환곡 총액이 다른 도에 비해 월등히 많았을 뿐 아니라 환곡의 폐단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1862년 농민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국가의 이정정책 가운데 경상도와 관련된 내용, 그리고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논의구조와 시행과정, 그 성과와 한계 등에 대해 주목하였다. 먼저 18세기 후반 이후 경상도의 환총운영, 환곡폐단의 일반적 실정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환곡 이정을 위한 정부 대책과 읍별 대책에 대해 알아보았다. 주로 진주와 단성의 사례를 살펴보았는데 단성은 지속적으로 환폐와 대책이 논의되었던 고을이었고, 규모가 작은 山郡의 사례로서 들 수 있다. 진주는 규모가 크면서 한편으로는 兵營이 설치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책에 있어서도 단성은 감총, 진주는 결렴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읍의 조건과 대책 방식을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책에는 감사, 해당 고을의 수령이 적극적으로 대책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을민들의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일반민들의 참여의 폭이 넓어졌다고 보인다.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수령 중심으로 진행되었을 때 결국 농민항쟁과 같은 저항이 일어났다. 그만큼 환곡문제는 농민들에게 절실했고 한편으로는 부세 문제도 일방적인 수취대상에서 직접 참여하려는 의식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경상도 가운데 단성의 경우 계속되는 등소운동과 감영의 환총을 줄이려는 대책이 있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관에서 포흠을 강제로 충완하고자 하여 단성민의 거센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뒤 상당한 액수가 탕감되었으나 국가에서 여전히 환곡을 유지하려는 정책을 택하게 됨에 따라 새로이 환총이 입본되면서 환곡이 정비되었다. 진주는 환곡 액수 자체가 많은 것은 아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이무에 의한 포흠은 안핵사 박규수가 상당수를 징수하고 나머지는 절반탕감과 배봉의 형태로서 환곡이 정비되었다. 그간 각 고을에서 수십 년간 환곡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과가 미미했는데 농민항쟁을 거치면서 농민들의 요구를 담고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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