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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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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76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93 - 120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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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1392년 이성계의 즉위, 즉 조선왕조 개창이 공양왕의 선양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선양했다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공양왕이 왕위를 양보한 듯한 인상을 주는 서술도 많다. 하지만 고려말의 정국과 이성계의 즉위 과정에서 공양왕의 선양 행위가 끼어들어갔을 여지는 없다. 선양했다는 자료도 물론 확인되지 않는다. 공양왕은 죄인으로 폐출되었던 만큼 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공양왕이 선양하였다는 소수의 기록은 개인적 수준의 역사왜곡이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빚어진 조선왕조 건국에 대한 미화였을 따름이다. 조선시대 인사들이 태조의 왕조 개창을 논의할 때 중심을 이룬 것은 인심과 천명이 다한 고려의 마지막 왕을 이성계가 추방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태조의 행적을 정벌이라고 규정했고, 영조와 신하들은 정벌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 개창이 ‘자립’이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성계의 즉위 및 조선왕조 개창은 ‘추대’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왕실의 교체가 정당하다는 근거를 근원적으로 인심의 향배에서 찾았다. 이후 두 차례의 반정에서 다시 확인되듯이, 신하들이 국왕을 추대하고 이념과 체제에 어긋나는 국왕을 교체할 수 있다는 논리는 조선의 정치현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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