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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49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45 - 169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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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흥천사는 1865 년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으로 시주하여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寺中에 전하는 여러 懸板記文들에는 물론, 1930 년 왕릉의 조포사 조사보고를 엮은 廟殿宮陵園壇造泡寺 調에도 흥선대원군에 의한 거액의 물적 지원이 전하고 있기에, 흥선대원군의 흥천사 중흥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2016 년 7 월 흥천사 극락보전에서 발견된 3 건의 상량문은 또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흥천사 극락보전은 1738 년(영조 14) 8 월 28 일 立柱上樑되었으며, 1794 년(정조 18) 6 월 9 일에 金祖淳부부 등의 시주로 改建上樑된 바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1853 년 대웅전(극락보전) 중창 당시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부부가 대시주하였고, 김조순과 교유하였던 것으로 알려진 應雲堂空如가 記文을 지었다는 바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3 건의 상량문은 흥천사 극락보전의창건년대를 새롭게 파악하게 하고, 흥선대원군에 의한 중창 이전에 安東金門의 원찰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김조순을 필두로 하여 김좌근으로 불사 시주가 이어진 바는, 흥천사 이전 신흥사였던 시절에, 안동김문의 원찰 중 하나였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김조순에 의한 직접적 시주는 1794 년, 1832 년에 이뤄졌고, 그의 死後에는 1853 년과 1857 년에 김좌근의 후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1865 년 흥선대원군에 의한 대대적인 시주에는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가 동참하고 김좌근의 애첩 나합은 적조암 소속으로 동참하였다. 이후 안동김문의 후원은 더 이상 파악되지 않는다. 한편, 정릉의 조포사인 흥천사 불사에 1865 년, 전국적으로 모연하고 전국 각지의 현령들이 快擲 한 것은, 고종 즉위 초기 당시 흥선대원군의 막강한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흥선대원군 자신도 거금을 희사하여 별도의 현판에 기원문이 수록될 정도였던 것은 흥천사를 특별한 공간으로, 즉,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세운 ‘왕실 원찰’이라는 의미를 부여 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흥천 사의 위상에 대한 인식이 엄귀비로 이어져 시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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