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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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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6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23 - 153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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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은 1619년 조선과 후금(청)이 싸운 심하전역에서 패전 후 항복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홍립은 광해군과 미리 짜고 항복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홍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전 당시의 인식이다. 평안감사 박엽은 군량 공급에 소홀했던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조정에 보고했다. 또 하나는 숭명반청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서인들의 태도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청나라와 전개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청나라를 상국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부인하는 모순된 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합리화하는 방안으로 강홍립이 일부러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지 않았다. 또한 강홍립은 포로로 있으면서 광해군은 물론 인조에게도 청나라의 현실을 전달하면서 조선을 전화(戰禍)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멈추고 남하하지 않은 것은 강홍립이 중재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비변사는 강홍립이 “나라를 잊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부원수였던 정충신은 “강홍립 덕분이 수만 군이 물러나서 모든 백성들이 그 은혜를 감사한다”고 칭찬했다. 이 전쟁 때 고국에 정착한 강홍립은 곧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숭명반청 정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고,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는 강홍립도 사망한 후였으므로 인조는 직접 청나라 군영으로 나가서 항복해야 했다. 두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계속 정권을 유지했고,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강홍립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절개 있는 것으로 포장했다. 서인(노론)이 조선 후기 내내 집권하면서 이런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강홍립은 나라의 명으로 원치 않는 전쟁에 나가서 최선을 다했고 패전 후에도 나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제 그를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자로 재평가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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