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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인숙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음악문화학회 한국음악문화연구 한국음악문화연구 제14집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63 - 84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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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연의 율관 제작에 관한 실록의 기사 중 『세종실록』 권47 세종 12년 2월 19일 다섯 번째 기사의 내용을 1430년의 시점으로 해석한 오류를 바로잡아 박연 율관 제작의 연대를 재고하고, 악기 제작의 배경적인 이해를 도모해 본 글이다. 박연의 율관 제작은 이혜구에 의해 밝혀진 내용과 같이 제 1차는 세종 7년(1425) 가을에서 세종9년(1427) 4월 이전에 해주산 거서(秬黍)로서 만들었으나 황종음이 중국 경(磬)의 황종보다 높아 채택하지 않았다. 박연의 제 2차 율관 제작은 세종 9년(1427) 4월에 역시 중국 경(磬)의 황종(黃鍾)에 맞추어 거서 모양의 인공 밀랍을 쌓아 제작했다. 동율관은 그 2년 뒤인 세종 11년(1429) 죽율관의 부실함을 깨닫고 다시 제작한 것으로 이상이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세종시대 율관제작의 역사 전부이다. 세종 12년의 기사는 율관제작을 모두 마친 뒤에 나온 그간의 논의를 모아놓은 보고서임을 확인했다. 황종율관의 제정은 기본 음고를 제정하는 의미 외에도 도(度)‧량(量)‧권(權)‧형(衡)의 기준을 정하는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제도의 완비 측면에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박연이 율관의 제정에 사용한 밀랍은 첫째 그 모양이 해주 거서의 형태를 취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인공의 기장이지만 거서를 쌓아 만든다는 기본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황종율은 중국의 율을 따랐음에도 그 척도로 사용된 것이 형태가 일정한 밀랍인 덕분에 도량형의 표준에는 더 적합한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 악률 이론을 검토하고 한국의 기장으로 여러 차례 율관 제작의 시도를 한 박연은 결국 자연산 기장이 율관 제작에 무용함을 깨닫는다. 박연의 율관 제작은 고제의 복원이라는 이상과 권도의 실현이라는 방편이 조화를 이루어 낸 독창적인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중국 고제를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대안을 찾아 완성한 박연의 율관 제작과 아악의 정비 사업은 조선 초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적 질서 속에서 개혁을 주도한 유학자가 이루어 낸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문제 제기
Ⅱ. 박연 상소문(세종 12)의 배경과 내용
Ⅲ. 율관 제작 기사의 재해석
Ⅳ. 박연의 음악관과 율관 제작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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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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