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동훈 (가톨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43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33 - 64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고려 말 향교 복구는 국방의 안정화에 따른 지방 사회의 안정, 지배 이념으로 서 성리학의 위상 강화, 원의 향교 설치 조서 등에 의해 이뤄졌다. 복구된 향교 는 고려 향교의 영향으로 廟와 學의 구역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교과 내용 을 확인할 수 없지만 학문 풍토의 변화에 따라 점차 禮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해 갔다. 조선 건국 후 향교는 전국의 군현에 설치되었지만, 향교 건립은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고려부터 향교가 이어진 경우, 건국 즈음에 새롭게 지어지는 경우, 고 려부터 이어졌던 향교가 중건되는 경우, 건국 즈음에 새롭게 지어졌던 향교가 중건되는 경우가 제각각 이뤄졌다. 이러한 향교 건립 양상은 각 고을이 처한 정 치적?경제적 상황에 따라 향교가 건립되었기 때문이었다. 향교의 건립 상황에 따라 그 내부 구성 요소도 다르게 나타났다. 대성전의 경 우 위패가 아닌 塑像을 안치하거나 그림을 걸어둔 경우가 있었다. 이는 고려부 터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거나, 혹은 위패 사용이 공식적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지어진 경우에 해당했다. 강당은 대규모 인원을 한 번에 수용할 만한 행 사가 있을 경우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꼭 있어야 하는 건물은 아니었다. 樓는 혹서기를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향교의 필수 요소라기보 다는 ‘있으면 좋은’ 건물이었다. 강당과 루는 각 고을의 재정 형편에 따라 보유 여부가 달랐다. 향교 學舍가 건립되기 전까지 政廳?私家?절 [寺] 등의 공간을 빌려 교육을 행했다. 별도의 공간을 갖지 못하고 다른 공간에 거처하던 ‘寓居 향교’는 고려 말 지방 사회의 동요와 누적된 전란의 피해로 온전한 단독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측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