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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상의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75 - 416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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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계훈제의 회고록 「植民地 野話」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일제지배 말기 조선인 ‘징용학도’의 동원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 글이다. 일제는 1943년 10월 조선인 전문학생과 대학생을 학도지원병으로 모집하고, 지원을 거부한 학생들을 곧바로 징용하였다. 학도징용이었다. 학도지원병은 명목상은 ‘지원’이었지만 사실상 강제동원이었고, 이것을 거부한 학생들을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해 징용하여 사회에서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계훈제는 학도병 지원을 거부하고 도피하다가 체포되어 징용당한 학도 중의 한명으로서, 회고록 「植民地 野話」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특히 징용학도들의 심리를 잘 묘사하였다. 징용학도들은 ‘황군’이 되기를 거부한 ‘비국민’, ‘사상범’으로 인식되어, 우선 육군지원병훈련소에서 2주간 강도 높은 정신훈련을 받았다. 계훈제도 1944년 1월 징용되어 훈련소에 있다가 평양 외곽에 있는 오노다시멘트 승호리공장에 배치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노역을 하였다. 작업장에서 집단 수용된 징용학도들은 일반 노무자들과 격리된 채 퇴역한 일본 군인의 감시하에 집단으로 정신훈련을 받고 육체노동을 하였다. 시멘트 원료인 석회암의 발파, 분쇄, 운반 등 단순노동에서 용광로용 내화연와의 운반, 시멘트가루 푸기, 시멘트포대 운반, 심지어 일본인 사택 오물 수거 등의 잡역을 하면서 정신적인 모욕을 느끼는 한편, 중노동과 영양부족으로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황군’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었다. 징용학도는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존재는 아시아ㆍ태평양전쟁기 일제의 총동원체제의 성격과 의미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식민지의 최고 엘리트까지 전쟁터로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식민지교육과 황국신민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년·학생들은 자신의 신념에 근거해 학도병 지원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지원 거부자들을 징용함으로써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고된 노동으로 처벌하여 그들의 저항의식을 말살시켜야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총동원체제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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