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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정 (진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77輯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43 - 93 (51page)
DOI
10.31335/HPTS.2022.04.7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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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태조비 신덕왕후가 종묘부묘에서 배제된 지 260여년 만인 현종대 종묘추부가 이루어진 정치적 의미를 효종 왕통과의 상관성 속에서 살펴본 것이다. 기해예송으로 물러나 있던 송시열은 정계에 복귀한 후 추부논의를 제기하였는데, 그 초점은 태조의 처로서 왕비임을 논증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태종이 신덕왕후가 첩이라는 명분으로 부묘에서 배제한 논리를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추부논의는 천자의 ‘고명’을 받아 국모임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명 태조가 사망 당시 보낸 조위 사적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후대왕이 효를 실현하기 위해 부묘를 실행해야 한다는 공론이 정립되었고, 현종은 이를 수용하였다.
신덕왕후의 종묘 추부는 효종을 첩자로 폄강하였다고 비판받은 기해예송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송시열이 첩으로 규정되어 종묘에서 배제된 신덕왕후를 처로 바로 잡아 부묘를 주장한 것은 형제의 차서에 따른 종통의 적서구분이 국왕과 왕비의 위상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태조의 인정과 명 황제의 고명을 명분으로 하는 추부의 논리는 반정 이후 국모로서 특별한 정치적 위상을 획득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및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위상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론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부묘의례에서 경복궁에서 신주를 제주한 후 경덕궁에 봉안하였다가 종묘에 부묘하도록 공간을 구성한 것은 인조가 인목왕후를 복위시켜 함께 거주하고 효종이 장렬왕후를 창덕궁으로 복귀시킨 사적과 연동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결국 현종대의 신덕왕후 종묘추부는 사종설에 의해 제기된 효종의 적서와 부묘 논란을 상복을 입는 장렬왕후의 위상을 통해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추부론의 논점변화와 ‘개국정후(開國正后)’론
Ⅲ. 효종의 왕통과 계모(繼母)의 정치 위상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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