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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남중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고조선단군학회 고조선단군학 고조선단군학 제47호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55 - 111 (57page)
DOI
10.18706/jgds.2022.4.4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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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낙랑국을 중심으로, 낙랑군, 낙랑 조선의 관계를 다루었다. 낙랑국은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낙랑국은 낙랑군 지역 또는 옥저 부근에서 찾는데, 고구려 적석총과 낙랑군 유적의 분포를 비교해 보았을 때 평안남도 동부 산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지역은 낙랑군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인데, 낙랑군에 유입된 낙랑국의 일부 주민은 낙도현으로 편제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은 청동기 시대 이래로 고인돌ㆍ석관묘 등을 축조하던 세력, 중국 동북의 청동기 문화와 연결되는 세형동검 관련 세력 등이 있었다. 두 세력의 유적 분포를 보면 약간 구분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고인돌 유적은 평안남도 동부와 황해도 북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두 세력의 분포를 초원 4년(기원전 45) 호구부와 비교해 보면 전자와 관련된 세력이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낙랑국은 이들과 관련된 세력으로, 낙랑군 지역으로 이주한 고조선 즉 낙랑 조선인들과는 구별되었다. 낙랑군의 낙랑은 낙랑국에서 유래하였다.
낙랑 조선은 한의 낙랑군 통치 과정에서 중간 통치자 역할을 하였다. 한의법은 이들의 犯禁으로 번역ㆍ적용되었다. 이로 인해 낙랑국 등 토착 세력에게는 낙랑 조선인들이 통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으로 비춰졌다. 또한 한의 통치 속에서도 非漢系 토착 세력은 한에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이런 점에서 낙랑은 중국사로만 볼 수 없고 고조선사의 일부로도 다뤄질 수 있다고 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낙랑국의 위치
Ⅲ. 낙랑국과 낙랑 조선의 관계
Ⅳ. 한의 낙랑군 통치와 낙랑 조선ㆍ낙랑국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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