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효진 (조선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22.5
수록면
209 - 238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는 엘레우시스를 대표하는 종교 의식이었으나,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에는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 범 그리스적인 종교 행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의 여러 사제직 중에 가장 중요한 신관직은 히에로판테스와 다둑코스를 들 수 있는데, 히에로판테스는 에우몰포스 씨족에서, 다둑코스는 키리케스 씨족에서 배출되었다. 히에로판테스의 역할은 입교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둑코스의 역할을 소 미스테리아와 관련이 깊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을 보면, 이러한 사제직들은 엘레우시스가 아테네로 편입된 이후 공식적인 역할이 정립된 것으로 보이며 일정 부분에서는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다둑코스를 배출한 케리케스 씨족은 친 아테네적 성향을 다수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소 미스테리아를 관장하는 사제로 선택된 사제 가문은 케리케스였다. 또한 케리케스 가문은 클레이스테네스 치세 전에 아티카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다둑코스의 역할을 한 때는 아테네인들과 분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케리케스 가문은 아테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테네는 긴밀한 관계성을 통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성소의 변화를 보면, 페르시아 전쟁으로 그리스 전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폐허가 되었고 엘레우시스나 아테네도 예외가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복구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키몬을 시작으로 페리클레스로 이어지는 아테네 정치인들은 엘레우시스 데메테르 성소를 재건축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텔레스테리온의 규모는 이전 시기에 비해 매우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성소의 규모가 커지면서 방어벽에 해당되는 페리볼로스가 새롭게 세워졌는데 매우 견고하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아테네의 데메테르 성소인 엘레우시니온도 변화했는데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벽을 건축했다. 이외에도 트립톨레모스의 성소가 새롭게 건축되었고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잇는 ‘신성한 길’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했으며 이는 아테네가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여한 측면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물러나고 그리스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분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레우시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불안한 측면도 갖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아테네는 엘레우시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하고 엘레우시스 사람들을 친아테네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아를 통해 아테네인들은 여러 폴리스에 아테네가 데메테르 여신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이며 이러한 시혜를 다른 폴리스에 전하는 민족으로 보이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