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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영주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3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35 - 7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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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광주지역의 삼국시기 중심지와 통일신라시기 무진주의 개발 시기와양상을 살펴보았다. 광주지역에서 마한 시기에 해당된 유적은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전엽으로 편년된다. 유적은 하천의 충적지와 구릉에 입지하여 농경을 기반으로, 토기 제철옥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적 성격의 복합유적에 해당된다. 그중 하남동유적은 5세기대에 의례적인 성격을 보이는데 구사오단국의 중심지에 해당하며,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의 대상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게 병합된 이후의 사비기에는 광주천 일대의 배후지를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각화동과 운림동고분군의 입지를 통해 고분 관련 집단의 세거지는 산사면 아래의 구릉지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진주는 현재 금남로 일대로 1917년 지적원도에서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의 무진도독성은 무진주의 방리와 관청을 감싸는 나성으로 장방형의 형태로 추정된다. 범위는 동쪽과 서쪽은 동계천과 광주천으로 구분되며, 남쪽은 학동, 북쪽은 누문동의 경계로 보인다. 1방은 155m~160m 정도로 보이며, 장축 남북 은 13방~14방으로 약 2,400m 정도, 단축 동서 은 4방 5방으로약 700m~1,000m 정도로, 전체 규모는 약 6,500m 정도로 추정된다. 무진주는사벌주와 경주 도심 개발 양상을 통해 보면, 늦어도 7세기 후엽 8세기 초에 정비되기 시작하며 배후산성인 무진고성이 축조되기 이전인 8세기 후엽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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