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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창석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백제문화 제56호
발행연도
2017.2
수록면
5 - 30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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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에서 발견된 銘文 자료에 ‘水多寺’가 나와서 慈藏律師가 北小京에 건립한 사찰이 강릉이 아니라 평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639년에 설치된 북소경은 강릉, 평창을 포괄한 광역의 행정구역이었으며 그 治所가 강릉에 있었다. 북소경이 성장하여 溟州가 되었으므로 명주는 中古期 말에 이미 광역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朔州의 원형은 牛首州였다. 637년 우수주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停 군단의 주둔지로서 지역 거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군단은 比列忽, 達忽을 거쳐 이동한 것이어서, 춘천-안변-고성이 같은 방어 권역에 속했다. 진흥왕 때 장악한 영서지역의 교통로와 추가령구조곡이 연결되어 568년 황초령,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통 상황을 기반으로 하여 673년에 우수주는 광역주로 개편되었다. 이밖에 7개의 주는 처한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변천 양상을 보였을 것이다. 명주와 삭주, 그리고 부분적으로 살펴본 上州(尙州), 下州(康州)의 경우 이주한 王京人에게 물자를 공급하고 주둔 병력에 군수품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이 광역화의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즉 광역주 출현의 배경에 수취품의 취합과 운송, 그리고 교통로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는 중고기 말부터 수취를 중심으로 한 국가 차원의 물자유통을 고려하여 지역 거점을 廣域州로 바꿔나갔고, 전통적으로 활용되던 교통로를 고려하여 주의 영역을 설정했다. 광역주가 성립함으로써 州治가 예하의 행정 단위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관내에서 행정?경제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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