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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범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80輯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159 - 195 (37page)
DOI
10.31335/HPTS.2023.04.8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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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연기현의 경관구조가 기록된 지리지와 읍지를 통해 연기현의 변화상이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았다. 연기현의 경우 15세기부터 사회경제의 중심지는 읍치였다. 대부분의 공공시설은 읍치를 중심으로 자리를 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읍치가 아닌 지역의 관청은 금사역이 있을 뿐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변화가 보였다. 사찰의 폐사가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다른 군현의 경우 사찰이 새롭게 생겨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나 연기현은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8세기부터 상대적으로 내용이 충실해지면서 변화상을 추적할 수 있다. 우선 도로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읍치를 중심으로 5곳에 이르는 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청주와 금강으로 가는 길이 대로이고 나머지는 소로였다. 이는 금강변에 나리포가 개설되면서 상업 유통이 이 대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연기현의 전세와 대동세가 아산의 공진창 포구로 수납을 시작하면서 전의현에 이르는 북쪽 연결 도로도 대로로 편입되었다. 대로의 형성에서 상업 유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읍치가 결국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연기현 내의 장시가 읍내장만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연기현의 경우 읍치를 제외한다면 특별한 교통로 상의 결절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읍치 이외의 도회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금강변에 위치한 나리포가 그러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포가 임피로 이전되면서 더 이상 금강변에 위치한 진도(津渡)는 육로와 수로를 연결하는 결절지 기능을 하지 못했다. 도리어 읍치에서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면서 읍치 중심의 경관구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15~17세기 경관의 구성 과정
Ⅲ. 18세기 경관구조와 도로 체계
Ⅳ. 19세기 경관구조와 역사지리의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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