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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일례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9호
발행연도
2023.2
수록면
77 - 11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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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왕대는 대외적으로 위(魏)의 위협이 여전한 상태였다. 대내적으로는 즉위 초반부터 왕제들의 반란, 연씨 왕후와 관나부인의 갈등 속에서 부침하였다.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총애하여 장차 소후로 삼고자 했다. 왕후는 관나부인이 왕의 총애를 독차지할까봐 염려하여 위에 진상하라고 종용하고 관나부인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관나부인은 왕후가 자신을 가죽주머니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한다고 왕에게 하소연 했지만 왕후에 대한 참소로 여겨져 오히려 가죽주머니에 담겨 서해바다에 던져졌다. 표면적으로는 왕후에 대한 투기와 참소 그리고 세력간의 분열을 방지하려는 조치이지만 그 이면에는 중천왕대 정치세력간 우열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본다. 왕후ㆍ국상ㆍ부마도위와 같은 특정 세력이 주로 연나부 출신이라는 것은 중천왕대 연나부세력의 우위를 보여준다. 중천왕 12년 왕은 두눌곡에서 사냥을 하였고, 위의 침공이 있자 5천의 정예기병을 선발하여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워 쳐부수고 8천여 명의 목을 베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왕인 동천왕대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남옥저로 달아나는 등 국가적 위기를 겪었었다. 그런만큼 중천왕대 위와의 전투에서 거둔 성과는 특별한 것이다. 위의 침입에 맞서 서부의 두눌곡에서 이동한 중천왕이 북부의 양맥곡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지역의 헌신과 협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중천왕은 그 다음해에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면서 위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것을 축하하고 통합된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였을 것이다. 바로 그 이유가 대부분의 시조묘 제사가 즉위 초반에 거행된 것과 달리 중천왕대에는 재위 13년만에야 행해졌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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