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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호진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112輯
발행연도
2024.10
수록면
81 - 11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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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8월 옛 독립협회 계열의 일부 인사들이 친일단체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지방의 각 단체뿐만 아니라 관리까지 나서서 일진 회에 반대하고 일진회 파괴 활동을 전개하였다. 향약도 각지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화서학파 문인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발맞춰 제천향약을 시행하고 혼란한 시국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정규는 스승 유인석의 명에 따라 이소응과 향약의 시행을 논의하였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제천향약을 시행하였다.
유인석 등 유생들에게 일진회는 망국의 징조와도 같았다. 일진회는 상투를 지키고 둥근 소매의 옷을 입는 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서학파 문인들은 동학농민군을 ‘동학 난당’, ‘동비’로 표현하며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화서학파 문인들이 일진회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일진회를 반대하는 의식 속에는 항일의식이 있었다. 제천향약을 주도한 이들 가운데는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일진 회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간파하였다.
그런 까닭에 제천향약은 매우 긴급하게 시행되었고, 해주 및 화양 동의 향약과 차이를 보였다. 또한 의병의 근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에도 의병의 근거지로 여겨진 충북에서는 향약과 의 병이 동일시되었다. 그리하여 원용팔이 1905년 음력 7월 의병을 일으켰을 때 제천향약도 일제의 탄압을 받아 중단되었다. 제천향약은 위정척사의 실천 방책이자, 기존 사회질서를 지키는 무기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제천향약의 시행 배경
Ⅲ. 약원 구성과 조목 분석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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