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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심봉근 (동아대학교)
저널정보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문물연구 문물연구 제45권 제45호
발행연도
2024.5
수록면
1 - 2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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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구산성지와 채석유적 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구산성의 축조 배경을 검토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문헌상으로 구산성이 위치한 완포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전기까지 의안군 합포현 소속이었다가 조선 문종조에 웅천군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6세기 전반 신라의 가야지역에 대한 남진 정책에 의해 금관국, 탁순국과 함께 신라에 편입되면서 가야지역 서진책과 점령지에 대한 관리와 통제, 왜, 백제의 남해안 침투로 차단 등을 목적으로 국경지대에 축성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구산성도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금관국과 안라국의 신라 편입시기 즉, A.D.532년 전후가 매우 주목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구산성 축조배경과 성격파악을 위한 고고학적 자료는 체성과 여기에서 수습된 유물이다. 구산성은 구산(해발 116m) 9부 능선상에 곡선 타원형으로 축조된 테뫼식 석축성으로 둘레 350m이다. 체성은 세장방형으로 치석된 석재를 이용하여 지면에 수직하게 바른층쌓기 하였는데 기단부 폭 6m, 잔존하는 상단부 폭 5.5m의 내탁후 상부에서 협축한 형태이다. 체성 동북쪽 기단부를 관통하는 인수구에서 동쪽 성내로 통과 후 남벽 퇴수구에 연결되는 수로가 있고 북서쪽 외황 부분에 바닥이 계단상을 이루는 회곽도가 있다. 문지는 남문은 현문식이며 기단보축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체적인 특징은 5-6세기대 남해안과 내륙지방에 축조된 삼국시대 신라성과 대차가 없다. 채석유적은 체성에서 서쪽으로 100m정도 이격된 계곡부에서 확인되었으며 주변에서 화강암 암괴를 이동해서 집석한 후 성석을 가공한 장소이다. 성석의 치석과정이나 주변 인부막사(누자식건물), 수습된 유물의 특징 등에서 단기간 사용되고 곧장 폐기시킨 것으로 파악되었다. 다시 말하면 성곽 축조를 위해 급조된 유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구산성이 단시일 내에 완성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바른층쌓기 체성 축조수법, 인수로, 현문 등의 특징과 두 유적에서 공통적으로 수습된 단각고배와 보주형꼭지에 반원문이 새겨진 뚜껑이 대표적인 자료로 파악하고 모두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편년하고 있다. 필자는 성곽 축조가 필요했던 전쟁관계 기사 대부분이 6세기 전반에 집중하고 6세기 후반으로 편년하는 단각고배가 체성축조 후에 혼입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 이전 즉, 늦어도 6세기 중반경에는 이미 축조되었을 것을 예상하고 있다. 최근 조사에서 확인된 부산 석성산성(6세기전반)과 함안성산성 목간(6세기중반), 함안가야리토성(6세기전반) 진해석동과 창원현동 고분군의 함안토기소멸(6세기중엽)등이 참고된다마지막으로 구산성의 성격은 삼국시대(가야) 완포국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서진과, 왜, 백제 견제 등 신라 국토확장 정책에 따라 당시 국경지 완포에도 산성이 축조되었고, 뒷날 신라의 점령지에 대한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완포촌, 완포성, 완포현, 완포향과 같은 행정체제의 중심지가 되면서 치소성으로 그 역할이 바뀐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현으로 승격되면서 고산 기슭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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