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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성권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불교사연구소 한국불교사연구 한국불교사연구 제25호
발행연도
2024.6
수록면
61 - 9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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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봉림산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玄昱(787~868), 審希(855~ 923), 璨幽(869~958), 忠湛(869~940)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았다. 현욱은 봉림산문을 개창한 심희의 스승이다. 현욱은 중국 유학 후 실상사에 머물다가 940년경 여주 혜목산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20여년 이상 거주하였다. 현욱이 혜목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왕실의 요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달사의 창건은 9세기중반경 한강유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고자 하는 신라 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심희는 신라의 국사였다. 심희는 현욱의 제자로 혜목산에서 출가하였으며 무주와 명주 일대에도 머물렀다. 장년기에는 김해 봉림사에머무르며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다. 봉림산문 개창 이후 심희는 적극적으로 신라 왕실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심희 입적 후 경명왕은 친히 심희의 탑비문을 작성하였다. 심희의 탑비를 세운 경명왕은 심희의 명성을 빌려 신라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충담은 심희의 제자이며 유학을 갔다 온 후 태조 왕건을 찾아가 왕사가 되었으며 원주 흥법사의 주지로 활동하였다. 살아생전 적극적으로 고려 왕실의 안정을 도운 충담은 입적 후에도 자신의 탑비를통해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탄생을 구 신라 지역민들에게 알리는역할을 하였다. 찬유 역시 심희의 제자였다. 찬유는 젊은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떠났으며 유학에서 돌아온 후 태조 왕건을 만나 천왕사의 주지가되었다. 찬유는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한강 유역 및 주요 교통로의주지가 된 선승들과 다르게 천왕사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고달사로거처를 옮겼다.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광주지역 호족세력의 변화로해석하였으며 혜종과 충주유씨세력의 권력투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봉림산문의 주요 인물은 왕실과 결합된 강한 현실참여형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봉림산문의 주요 인물은 모두 당대를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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